투자자 국가 간 소송(ISD)은 최근 10년간 급증했다. ISD를 관할하는 대표적 기관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따르면 올 들어 6월까지 제기된 ISD 사건은 28건이다. 1990년대까지 기껏해야 1년에 10건 미만 수준에 머물렀던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지나친 국가의 규제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났던 ‘관행적 조항’이 이제는 기업(또는 자본)의 이득을 위한 ‘실체적 무기’로 진화했다고 지적한다. 최근에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이 걸린 ISD를 사실상 ‘돈 버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투자펀드까지 등장해 이 같은 ‘ISD 사냥꾼’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급증하는 ISD…지난 1년간 접수된 사건 역대 최고치=ICSID는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를 기준으로 한 ‘2015(회계연도) 연간 보고서’를 최근 발간했다. ICSID가 설립돼 국제 중재를 수행한 지 50년을 맞아 ISD 트렌드를 분석한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제기된 ISD는 52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1년 전 같은 기간(2013년 7월∼2014년 6월)보다 30%나 늘어난 수준이다. ICSID는 지난 1년간 접수된 사건(243건)이 역대 사건(525건)의 46%에 달할 정도라고 밝혔다.
한 해에 제기되는 ISD 사건이 수십 건에 달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한 해에 1건도 제기되지 않을 정도로 간헐적이었던 ISD는 외환위기(IMF)가 몰아닥친 1990년대 후반 10건대로 많아졌다. 남미 국가 등을 중심으로 정부가 도산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외국 기업(투자자)의 재산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국제 경제개방도는 더욱 높아졌고 기존의 국가 간 투자보장협정(BIT)은 물론 국가 간, 경제권역 간 다양한 자유무역협정(FTA) 등도 늘어났다. 2003년 ICSID에 접수된 중재 신청은 31건으로 뛰어올랐고 이후 매년 20∼30건이 접수됐다.
ISD 신청 건수 추이는 글로벌 경제 흐름과도 묘하게 얽혀 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각국에서 진행되는 투자사업 등이 좌초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실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반짝 회복세를 탔던 국제 경기가 재침체 국면에 빠진 2012년 신규 접수된 사건은 처음으로 50건을 기록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의 경기 침체로 대부분의 투자가 중남미나 동남아,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 집중되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애초 ISD라는 제도의 목적도 정부 정책이나 법·제도의 투명성, 공정성이 상대적으로 보장되기 어려운 국가에서 투자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ISD 위해 돈 모으는 투자자들, ‘제3자 펀딩’의 위협=그런데 과거 ISD를 비롯한 국제 중재 사건에서는 특정 국가가 과도한 규제를 상대로 제기했던 것과 달리 점차 민간 자본이나 기업이 이익을 얻기 위해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주목할 점은 ISD는 투자자·국가 간 소송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해 당사자들이 선정한 중재인들이 적정한 판정을 내려주는 중재 절차라는 데 있다. 무엇이 더 옳은지를 따지는 절차가 아니라 이익을 침해했는지를 판단하고 당사자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ISD를 제기해 중재 판정에서 승소할 경우 해당 기업이나 투자자가 얻는 이익은 많게는 수백조원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이 때문에 이를 노리고 ISD를 위한 투자자금을 모집하는 이른바 ‘제3자 펀딩’까지 등장하고 있다. 국제중재 분야의 로펌과 막대한 소송비용을 감내할 투자자, 실제 당사자가 되는 기업(혹은 투자자)이 사실상 하나의 팀을 이뤄 ISD를 제기하고 얻어내는 배상금을 나눠먹는 방식이다.
최근 삼성과의 분쟁으로 주목받았던 엘리엇은 이미 투자자를 모집해 ISD를 제기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대 최고 배상액을 기록한 ISD 사건의 배후에도 엘리엇이 있었다. 2003년 러시아 정부가 에너지 대기업인 유코스의 회장을 탈세·횡령 혐의로 기소했는데 이와 관련, 유코스의 외국인 주주들이 100조원대 ISD를 제기해 승소한 바 있는데 그 주주 중 하나가 엘리엇의 자회사인 로즈인베스트코였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종우 변호사는 1일 “ISD는 국제 법률시장에서 떠오르는 블루오션이다. 한마디로 ‘돈이 된다’고 판단되는 분야”라면서 “여기서 문제는 옳은 것을 따지는 절차가 아니라 이해관계를 따지는 절차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특히 제3자 펀딩의 문제는 국제중재 분야에서도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면서 “ISD와 관련해 우려됐던 ‘돈이 국가 정책과 시스템을 위협하는’ 일이 현실화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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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화된 괴물 ISD] ‘관행적 투자자보호 조항’서 ‘실체적 무기’로
입력 2015-12-01 21:43 수정 2015-12-01 2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