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화된 괴물 ISD] BIT 분명한 기준 없이 수십년간 ‘뒤죽박죽’

입력 2015-11-29 21:35 수정 2015-11-30 00:49

투자보장협정(BIT)은 국가 간에 투자를 촉진하고 보호하기 위해 외국 투자자나 기업의 사업활동, 이익 송금 등을 상호간에 보장하기 위한 협정이다. 외국으로부터 투자 유치에 목말랐던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BIT를 체결해 왔다. 1960년 미국과의 BIT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체결돼 발효된 BIT만도 87개다. 그런데 이 수많은 BIT 내용과 형식은 그때그때 달랐다. 정부가 분명한 규칙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9일 외교통상부와 국회 등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2009년에야 페이퍼컴퍼니의 투자자 국가 간 소송(ISD) 제소 방지 장치인 ‘혜택의 부인’ 조항 등이 들어간 ‘BIT 표준문안’을 마련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페이퍼컴퍼니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은 한참 늦었던 셈이다. 그나마 ISD를 여러 차례 당해 페이퍼컴퍼니 문제에 가장 발빠르게 대응했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혜택의 부인’ 조항 등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09년 정부의 표준문안이 만들어진 이후 발효된 협정은 6개에 불과하다. 체결 시점 기준으로는 3개뿐이다. 2009년 이전에 체결된 대부분의 BIT는 우리 정부의 분명한 기준 없이 상대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그때그때 다르게 적용됐다.

비단 ‘혜택의 부인’ 조항뿐이 아니다. 2012년 체결된 한·중·일 BIT에는 안보 문제나 국제 금융위기 등의 경우 ISD 제소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있지만 한·벨기에 BIT에서는 관련한 규정 자체가 없다.

그런가 하면 20여년 전인 1994년에 체결한 한·필리핀, 한·아르헨티나 BIT에는 투자보장 대상인 ‘회사’와 ‘투자자’를 ‘필리핀 공화국 영역 내에서 실제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법인’(필리핀 BIT), ‘당사국 영역 내에서 2년 이상 거주한 경우’(아르헨티나 BIT) 등으로 정의해놨다. 별도로 ‘혜택의 부인’ 조항이 있진 않지만 사실상 페이퍼컴퍼니를 배제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한참 후에 체결된 한·벨기에, 한·네덜란드 협정에 이 같은 내용이 들어갔다면 하노칼사나 론스타의 ISD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한·벨기에 BIT는 2006년 개정됐지만 발효된 시점은 2009년 정부의 표준문안 마련 이후인 2011년이다. ‘혜택의 부인’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서 “우리 정부가 얼마나 뒤죽박죽으로 BIT를 체결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