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엘러스 인생 항로의 연속적인 급변침은 조선에 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조선에 오기 전엔 전혀 계획치 않았던 일이 또 한 번 그녀에게 다가왔다. 번커와의 결혼이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엘러스는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새롭게 마련하는 여성전문병원 담당자이자 명성황후의 주치의 역할을 감당키 위해 이곳에 왔다. 따라서 그녀는 결혼한 이후에도 자신을 대신할 후임이 올 때까지 한동안 일에 매진하였다. 번커도 마찬가지로 육영공원 교사로 왔기 때문에 결혼 후인 1894년 2월까지 자신의 일을 했다. 결혼 이후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일단 이렇게 일단락이 됐다. 하지만 결혼 이전부터 그녀의 사명은 남편과 맞닿는 면이 있었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엘러스의 경우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라는 분명한 소속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서울의 선교사들 가운데 아무도 그녀의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결혼 이후 소속에 대해 문제를 삼는 이들은 있었다. 반면 번커는 처음부터 어느 특정 교단 소속이 아니었기에 이 점과 관련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기에 애니 엘러스와 번커가 새로 꾸린 보금자리를 중심으로 특별한 사역을 시작할 수 있던 근본적 이유가 있다. 이 역시 둘 중 어느 누구도 계획해 놓지 않은 일이었다.
결혼 이후 엘러스의 계획은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후임이 올 때까지 제중원 여성병원에서 의료사역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명성황후 시의로서 그의 건강을 돌보는 것과 조선 여자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키 위해 어렵게 설립한 여학교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이와 함께 남편 번커도 육영공원 교사 활동이 종료되면 함께 교단 본부 소속 선교사가 돼 같이 교육사업을 전담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미국북장로회는 물론 북감리회에서도 선뜻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단과 교단 사이에 놓여 있는 특별한 사명
1884년부터 1889년까지 호주 장로회가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에는 미국북장로회와 북감리회 두 개 교단 소속 선교사들이 주로 활동했다. 게일의 경우처럼 캐나다 토론토대학 YMCA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개별적인 활동을 했다. 그 뒤로 1890년 영국성공회, 1892년 미국남장로회, 1895년 미국남감리회가 들어왔다. 이 무렵은 번커가 기울어가는 육영공원을 지켜보려 노력했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임했던 시기였다. 책임감이 강했던 번커는 1888년 그보다 학교를 먼저 사직하고 떠난 길모어와 1891년 12월까지 함께 버틴 헐버트가 떠난 뒤에도 끝까지 남고자 했다. 그런 번커가 부인 엘러스과 함께할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교단과 교단 사이의 변경지대에 놓여 있었다.
번커에게는 일찍부터 교단과 교단 사이에서의 화합과 협력을 위한 사역이 주어졌다. 1886년 11월 6일 토요일 밤, 서울유니온교회를 운영키 위한 임원진이 선출됐다. 유니온교회는 1885년 6월 21일 주일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예배를 위해 시작되었다. 임원으로는 담임목사에 아펜젤러, 서기 겸 회계에 헤론, 이사에 스크랜턴, 언더우드, 번커가 선임됐다. 유일하게 번커만 교단 소속 선교사가 아니었다. 유니온교회는 애니 엘러스가 노춘경의 세례에 대해 이야기 했던 바로 그 교회다. 엘러스와 번커는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단 간 연합에 대한 필요성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조선 선교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었다.
1892년 6월 27일 월요일은 특별한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의 결혼식은 두 번에 걸쳐 진행됐다. 윌리엄 홀이 캐나다인지라 둘은 스크랜턴 부부, 존스와 벵겔이 참석한 영국 공사관에서 한 번, 미국인 로제타 셔우드를 고려해 미국 공사관에서 또 한 번의 식을 치러야 했다. 두 번째 결혼식에서 번커와 올린저가 함께 주례를 베풀었다. 로제타 홀의 일기에는 이 날 사용한 말씀이 적혀 있는데 해당 구절은 히브리서 13장 4절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였다. 번커가 미국북감리회 소속으로 가기 전 무소속 시절이었다.
1890년대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비극적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던 조선에 대해 번커와 엘러스는 남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선교 초기 조선의 선교사들은 대체로 이들과 같은 입장이었다. 곧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해 온정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서의 10년 많은 변화
남편 번커와 조선에서 십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애니 엘러스는 애니 엘러스 번커로, 의료선교사에서 교육선교사로, 선교사에서 선교사이자 선교사 아내로, 미국북장로회 소속에서 미국북감리회 소속으로 정체성 자체가 많이 바꿨다. 그 과정에서 엘러스는 많은 시간을 일종의 공백기처럼 보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은 자칫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지만 엘러스는 오히려 남편과 특별한 사역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녀나 남편 번커가 조선의 선교 현장에서 큰 의미가 없던 교단에 소속돼 활동하기엔 적절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 교단 간 연합의 현장에 그들이 늘 함께 하고 있었다.
이용민 박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
[첫 여성 의료 선교사, 애니 엘러스] 엘러스와 번커의 특별한 사명 ‘교단 간 연합’
입력 2015-11-30 18:00 수정 2015-11-30 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