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자 민주화의 거목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재임 시 공과에 대한 평가가 고인처럼 극단적인 사례도 흔치 않다. 국가부도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불러왔던 쓰라린 기억 때문에 초기 개혁의 성과는 국민 뇌리에서 잊혀졌다. 서거 이후 재평가 작업이 주목받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여야는 일시적이나마 정쟁을 멈추고 고인을 추모했다. 의회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역정은 여야 모두에게 귀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 빈소를 두 차례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의 국회 영결식에 불참한 것은 박 대통령의 악화된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 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거행됐던 과거 전직 대통령 영결식에 현직 대통령이 빠짐없이 참석한 관례를 들어 일각에선 이런 저런 얘기도 나왔지만, 박 대통령으로선 최대한의 예우를 한 셈이다.
박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은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던 듯하다. 그러다 보니 불편한 관계가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 박 대통령을 그리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유신 반대를 외치며 민주화 외길을 걸었던 정치이력에서 보듯 박 대통령을 평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다. 물론 때론 지나칠 정도의 독설을 퍼부은 측면도 있다. 박 대통령 역시 정치인 시절 김 전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직격탄을 날리는 등 대립해 왔다. 2012년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이후에야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관계가 됐다. 하지만 이것도 전직 대통령과의 형식적 만남에 가까웠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 정작 아쉬웠던 것은 다른 부분이다. YS 서거 이후 박 대통령은 고인의 정치 행보와 업적에 대해선 한 차례도 평가하지 않았다. 서거 당일에는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두 차례 빈소를 찾았을 때, 국가장(國家葬) 기간 국무회의에서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건조한 애도 외에 다른 언급은 없었다.
박 대통령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과 YS의 관계나 그간 박 대통령과의 불편했던 관계를 본다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보다 대범하게 YS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평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는 박 대통령의 소신과 업무 스타일로 봐선 쉽지는 않은 일인 듯싶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전직 대통령을 초청한 적은 한 차례도 없다. 국가원로들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눈 적도 없는 듯하다. 과거 정부와의 의도적 단절까지는 아니겠지만 선을 긋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요즘 박 대통령은 쉽게 풀리지 않는 국내 현안들 때문에 고민이 깊다. 집권 3년차인 올해도 어느덧 세밑이고 정기국회 회기 또한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개혁은 물론 경제·노동 관련 법안 처리 역시 불투명한 상황이다. 박 대통령이 얼마 전 “만날 앉아서 립서비스만 하는” 국회에 대해 또다시 강력한 경고장을 날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박 대통령이 한발 물러나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박 대통령이 자주 하는 ‘우문현답’(우리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처럼 국가원로들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국정의 해법이 나올 수도 있겠다. 과거와의 일방적인 ‘선긋기’, 대결구도, 서슬 퍼런 메시지가 더 이상 정국 돌파의 특효약이 될 수 없다면 소통과 관용, 포용의 마음을 키워보는 것도 한 방법일 듯하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 hsnam@kmib.co.kr
[뉴스룸에서-남혁상] 관용과 포용의 정신
입력 2015-11-29 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