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0년 9월 10일 국내 사과 주산지인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에서 마지막 ‘대관령 사과 축제’가 열렸다. 한반도 남녘에서 마지막으로 재배된 고랭지 사과를 맛본 축제 참가자들은 사과 재배 중단을 무척 아쉬워했다. 김부사씨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사과를 재배했던 강원도마저 사과 생산이 더 이상 어렵다고 해 너무나 안타깝다”면서 “마지막 축제에서 먹은 사과 맛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구온난화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85년 뒤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장면이다. 비교적 서늘한 기온에서 재배가 가능한 호랭성(好冷性) 작물인 사과는 현재 경남과 전남북, 제주도를 제외한 내륙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가 점차 뜨거워짐에 따라 21세기 말쯤엔 국내산 사과를 먹지 못할 수도 있다.
북상하는 농작물 재배전선
최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최된 2015 대한민국 과일산업대전에서 강원도 양구군 김성배씨가 재배한 사과와 영월군 고희환씨의 포도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원주시 신문선씨는 복숭아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사과와 포도는 강원도가 기후변화 대체작목으로 중점 육성하는 과일이다.
사과는 대구가 주산지였으나 이제는 재배 지역이 남한 최북단인 양구까지 북상했다. 양구 사과는 맛과 품질이 우수해 농산물 시장에서 타 지역산보다 10∼20%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경산 포도는 영월까지, 청도 복숭아는 원주와 경기도 파주까지 북상했다. 과수 재배 한계선이 북상하면서 주산지도 바뀌고 있다.
환경부와 기상청이 펴낸 ‘한국 기후변화 평가보고서 2014’ 책자를 보면 1954년부터 1999년까지 한반도 연평균 기온은 10년마다 0.23도씩 증가했다. 2001년부터 2010년 사이에는 0.5도 상승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2100년엔 우리나라 평균 기온이 현재보다 5.7도 더 높아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따라서 2090년 남한에서 사과는 강원도에서만 생산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사과 재배가 가능한 지역이 2020년에는 국토의 48%를 차지해 현재와 비슷하지만 2050년에는 13%, 2090년에는 1%로 급감할 것으로 전망된다. 2100년엔 평창 대관령과 정선, 강릉 일부 고산지에서만 사과를 재배할 수 있다. 고랭지 배추밭이 과수원으로 바뀌는 것이다.
추위에 약한 복숭아는 2040년 강원도 대부분 지역에서 재배가 가능해지지만 2050년부터는 강원 영동지역에서만 재배가 가능할 것으로 예측됐다. 과거 30년 동안 포도 재배 적지는 경기, 충청, 전북, 경북이었으나 2090년엔 강원도 산간지역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27일 “기온이 1도 오르면 재배 적지는 80㎞가량 북상하고 고도상으로는 150m 상승한다”며 “지구온난화로 아열대 작물 재배는 증가하고 토종 작물은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에 열대작물 속속 상륙
강원도농업기술원 시험포장에는 멕시코 등 열대지역이 원산지인 차요테가 시험재배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오크라, 공심채, 롱빈, 여주, 인디언시금치 등 이름도 생소한 6개 작목을 도입해 적응성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적응성 시험 결과 여름철 야외에서 아열대 작물 재배가 가능하고 작황도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시 농업기술센터는 지난 9월 강서구 강동동 한 농가에서 구아바를 첫 수확했다. 아열대 과일인 구아바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지난해 도입해 국내 환경에 적합하도록 육종된 한국형 구아바다.
아열대 채소와 과일 등은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고, 재배 면적과 종류가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전남에선 파파야·구아바·망고, 경남과 전북에선 용과·파파야, 강원도에선 멜론·모링가·얌빈 등이 재배되고 있다. 망고는 2000년 7.2㏊에서 현재 23.1㏊, 아스파라거스는 1.5㏊에서 70㏊로 크게 늘었다. 강황은 7㏊에서 121㏊로 30배 이상 증가했다.
기후와 지리적 여건에 발맞춘 과감한 작물 재배 전환은 농가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통계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강원도 내 과수 재배 면적은 2006년 1760㏊에서 올해 2832㏊로 10년 새 1072㏊ 늘었다. 양구의 경우 올해 120여 농가가 105㏊에서 사과를 재배해 3020t을 생산, 120억원의 소득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2005년 양구 지역에서 처음 재배한 ‘양구멜론’의 재배 면적은 2013년 10㏊에서 올해 17㏊로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생산량은 2013년 258t에서 올해 438t, 농가소득도 2013년 9억3000여만원에서 15억8000여만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평창멜론도 2008년 1322㎡에서 올해 6.1㏊로 크게 늘었고 현재 9억5000만원의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새로운 작목 도입 신중해야
2010년 강원도 평창 사과농장에서는 총 20㏊ 면적 중 6㏊를 갈아엎었다. 같은 해 봄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가면서 사과나무가 추위를 견디지 못해 얼어 죽었기 때문이다.
평창군 관계자는 “당시 사과 재배 농가들은 재배 기술과 정보가 부족해 추위에 약한 경북 지역의 묘목을 들여왔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면서 “이후 농가들이 추위에 강한 품종을 들여와 지금까지 별다른 피해가 없다”고 말했다.
농촌 지역에선 기후변화에 따라 새로운 작물을 도입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지만 신품종을 도입했다가 자칫 농사를 망칠 수 있어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다.
특히 과수는 나무를 심은 뒤 수확할 때까지 최소 3년 정도 걸리는 만큼 검증된 재배 기술을 습득한 뒤 생산에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농진청 관계자는 “기온이 점차 올라가고 있지만 몇 년 안에 우리나라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며 “새로운 작목은 전문기관에 의해 안정적인 재배 기술이 확립된 후 경제성을 충분히 검토해 도입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주변 해역 수온 상승, 바다생물도 대변화
한반도 기후변화에 바다도 예외는 아니다. 국립수산과학원에 따르면 동해 표층수온은 1968년부터 2013년까지 46년간 1.3도 상승했다. 같은 기간 세계 표층수온이 0.4도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 상승 속도가 3배가량 빠른 것이다.
최근 동해안에는 아열대나 열대 어종이 잇따라 출현하고 있다. 지난 8월 경북 영덕군 강구면 앞바다에는 93㎝ 길이의 흉상어가 잡혔다. 지난 9월 중순에는 영덕군 축산면 앞바다에서 철갑둥어가 잡혀 올라왔다. 또 같은 달 30일 영덕 축산리 앞바다에서는 길이 4.3m의 고래상어가 혼획됐다. 이들은 주로 아열대나 열대 해역에서 발견되는 어종이다.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관계자는 “기후온난화로 동해안에서도 다양한 아열대, 열대성 어종이 수시로 출현하고 있어 수산생물의 변동사항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춘천=서승진 기자 sjseo@kmib.co.kr
[북상하는 농작물 재배지] 배추밭에 사과가 열리는 날
입력 2015-11-28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