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子 “한센인 사역 고민 때 답을 주셨지요”-父 “내 아들인 거 맞네 … 기도 응답에 따라야지”

입력 2015-11-27 20:27
아흔 일곱 아버지가 예순 넷 아들에게 옛 신앙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들 김명환 선교사(오른쪽)는 소록도를 거쳐 필리핀 딸라지역에서 한센인 사역을 하고 있다. 그가 지난주 선교 보고 차 귀국해 아버지 집을 찾았다.
2011년 필리핀 사역지에서의 부모.
‘사회복지인의 날’에 수상하는 김명환 선교사.
필리핀 한센인을 안수하는 김 선교사.
지난주 금요일 서울 남부터미널. 단단하게 생긴 한 남자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명환(63·예장합동총회세계선교회·GMS) 필리핀 선교사였다. 선교 보고 등을 위해 보름 전 귀국한 그는 출국 닷새를 남기고 아버지가 사는 충북 청주를 가기 위해 이른 아침 길을 나선 것이다. 등에 남자 고등학생에게나 어울릴 법한 백팩을 메고 있었다. 철 지난 옷도 그가 선교사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그가 탄 북청주행 시외버스는 두 시간 남짓 달렸다. 환갑 넘은 아들이 아흔일곱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들떠 있는 모습은 왠지 생경하다. 그는 버스에서 내려 대뜸 가게로 들어섰다. 손에 두유 한 박스를 들고 나왔다.

“아버지가 참 잘 드세요. 이걸 보면 얼굴이 환해지신다니까요. 어머니는 야쿠르트를 좋아하셨는데….”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사천동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평생 ‘영생의 아버지 집’을 찾는 삶을 살아온 주의 종 김명환. 그에게 육친의 아버지 집은 이 땅의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맏아들(히 1:6)이라면 김명환은 김영선(96·청주 예수사랑교회) 원로장로의 맏아들이다.

어둡고 긴 아파트 복도를 지나 발을 멈춘 그는 아버지 집의 벨을 눌렀다. 반응이 없다. 아들은 순간 당황한다. 다시 한번 누른다. “누구요” 하는 소리가 느릿하게 들린다. 아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예, 아버지 접니다.”

“어, 김 목사인가.”

망백을 훨씬 지난 아버지는 굽은 허리를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다. 눈빛도 맑았다.

아들은 들어서자마자 기도했다. 3년 만에 보는 아버지. 김 선교사가 백팩을 내려놓고 주섬주섬 물건을 꺼내 놓는다. 김치, 경단, 젓갈, 마른 고구마 등 먹을 것이었다. 그 물건 가운데 붉은 넥타이를 든 아들은 “이거 어멈이 드리라고 한 겁니다”하며 아버지 목에 대봤다.

아버지 김 장로는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던 북한의 신의주제2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어머니 계정숙(2012년 작고)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뿌리 깊은 크리스천 가정의 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축복 아래 결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내 일제 징병에 끌려갔다. 그리고 1945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연합군에 의한 원폭 투하로 광복을 맞이한다.

“폭탄 투하 소식에 모두 산으로 도망갔어. 도망병이 된 거지. 광복이 됐는데도 바로 귀국을 못했어. 하나님께 살아서 돌아만 가면 평생 복음을 전하며 살겠다고 맹세했어. 헌병대에 붙잡혀 감옥살이하다시피 하다가 그해 11월에 귀국했어.”

‘한센병’ 환자 선교하겠다는 아들

귀국 후 아버지는 월남했다. 그리고 경찰에 투신했다. 6·25 한국전쟁을 맞았고, 4·19혁명을 겪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야 하는 자리였다. 서울 종로경찰서, 중부경찰서, 청량리경찰서 등을 돌며 민중의 지팡이로 살았다.

“아버님은 신앙인으로 힘겨운 시절이었다고 했어요. 부정과 부패가 횡행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부모님은 의롭지 못한 것과 타협하지 않으셨어요. 청량리경찰서 관내인 전농동 살 때 늘 한센인, 부랑인 등이 들락거렸어요. 어머니는 새 밥을 해서 그들에게 퍼주었지요. 아버지도 남 돕는 일만은 여자일, 남자일 가리지 않았어요.”

그런 아버지는 장남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주일성수를 못하면 엄한 벌을 내렸고, 강건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유도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신입 경찰 유도 사범이기도 했다.

그런 그 아들이 어느 날 한센인 사역을 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고민은 깊어졌다.

“네가 내 아들인 거 맞다. 앞서 너는 하나님의 종이다. 네 기도응답이 그러했다면 그리 하거라.”

어린 시절 한센인들을 끌어 안으셨던 어머니에 대한 강한 기억, 그리고 전도사 시절 2년여의 소록도 사역을 통해 받았던 응답 등으로 고민하던 그였다.

“제가 군목 생활을 15년을 했어요. 그런데 앞서 전도사 시절, 소록도 한센인 교인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저를 청빙하러요. 저보고 “목사님, 우리는 목사님밖에 더 바랄 데가 없습니다”라며 제 소매를 잡아요. 어떻게 떼 냅니까. 아버님께 ‘이 잔을 받을까요’하고 묻고 싶은 마음 간절했었지요. 한데 먼저 답을 주신 거죠.”

김 선교사는 소록도 사역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소록도엔 3000여명의 주민이 있었다. 소록도교회는 지교회 형태로 일곱 교회가 있었다. 그는 10년을 헌신했다. 그리고 소록도의 환자가 줄고, 한센인에 대한 복지체계가 잡히면서 제2 사역을 고민했다. 그는 예수 시대 ‘깨끗함을 받기 위한’ 한센인들이 있는 열방을 향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때도 아버지가 묵묵히 답을 주셨다.

다시 아버지의 집.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치우려고 두리번거렸으나 어디 하나 손볼 곳이 없었다. 무도인(武道人)으로 살아온 아버지는 고령임에도 물건 하나 흐트러져 있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한다.

“어디 불편한 덴 없으세요?”

“이거 가져가. 나는 필요 없어.”

“아니, 어디 불편한 데 없으시냐고요.”

“다음 주 기도문 써야 해.”

동문서답이었다. 아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수리 맡긴) 보청기 언제 찾으세요?”

“주스는 변하는 거 아니니 꼭 가져가 먹어.”

김 선교사가 그런 아버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 선교 10년

“아버지가 은퇴하신 후 즐겨 하신 일이 성경 필사였어요. 어느 날 선교지에서 돌아오니 온 방에 붓펜으로 성경 말씀을 써서 도배를 하셨어요.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쓰셨더라고요. ‘아 아버지’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선교지에서 힘이 들어 지쳐 있었는데 아버지 방에 들어선 순간 다시 힘을 내자 마음먹었죠.”

그런데 이 부자에게 끔찍한 기억이 있다.

김 선교사는 2005년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두 시간 거리인 ‘딸라’ 지역에서 한센인 선교를 시작했다. 숱한 고비를 넘기며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세례 중 권총 강도가 들이 닥치는가 하면, 환자를 유기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자신들이 버린 한센병 어린이를 큰 병원에 옮겨 치료하는 중인데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19세기 말 하와이 한센병 환자 선교를 위해 헌신하다 그 병에 걸려 숨진 데미안 신부와 같이 자신도 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생떼를 부린 김 선교사였다. 그의 이러한 열정에 아내(김미언·56)가 간호사가 되어 도왔으며 동생 김명학(58) 목사도 동역을 자처했다.

이에 부모는 “너희들이 그리 한다면 우리도 작으나마 사역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2008년 부모가 두 아들의 선교지 딸라에 들어왔다.

“2012년이었어요. 제가 환자들에게 둘러싸여 일을 하다 피로가 몰려와 지쳐 있었어요. 어머니가 잣죽을 끓여주시겠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니는 그때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였어요. 그리고 가스 불을 켜는 순간, 펑 하고 가스통이 터져 버린 겁니다. 어머니가 그 화마에 소천하셨어요. 다행히 아버지는 목숨을 구했어요.”

필리핀 선교지서 사고로 숨진 어머니

단단한 남자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런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휴지를 건넸다. 두 남자는 각기 아내를, 어머니를 잃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귀국시켰다. 그리고 청주 사는 남동생이 모시도록 했다.

“아직 혼자서 살아도 된다. 나는 내 마음대로 기도할 시간이 필요해.”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혼자 사신다. 아버지의 책상엔 성경책, 찬송가, 필사노트, 아내 사진, 국가유공자증, 원로 가수 김상희와 찍은 기념사진 등이 놓여 있다.

“밥 먹었어? 가세. 점심시간인데…방아다리 추어탕 사줄게.”

아버지가 바지춤에서 꼬깃꼬깃 접은 돈을 꺼냈다.

“아이고,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먹을 복이 있습니다. 주스도 주시고요.”

아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추어탕집에서 늙은 아버지가 식사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버지, 김 목사 이 음식 먹고 강건하여 불쌍한 어린 양들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GMS필리핀 한센선교회

필리핀 딸라 지역에 설립됐다. 김명환·명학 형제 목사에 의해 운영된다. 400여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복음을 접했다. 의료선교에 나서면 1000여명이 한꺼번에 몰린다. 두통약 사리돈 반쪽이 이들에게 만병통치약이 되기도 할 정도로 오지다(문의 070-7687-8299).

청주=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