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청년부 여름수련회에서 다 같이 영화 ‘미션’을 감상하였다. 두 주인공이 나오는데 둘 다 현지인의 편에 서서 침탈에 저항하지만 한 사람은 비폭력 저항을 주도하고 한 사람은 폭력 저항을 주도한다. 하지만 결론은 둘 다 침탈자들에 의해 무너진다. 뒷부분에서 비폭력 저항을 주도한 가톨릭 신부가 죽어가면서 폭력 저항을 주도하는 주인공을 마지막으로 보고 쓰러지는데 이 부분을 가지고 청년부원끼리 토의를 했었다. 나는 아마도 비폭력 저항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눈빛으로 설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담당 전도사님이 다른 의견을 내셔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전도사님은 “그는 아마 다른 폭력 저항자들은 과연 성공하는지 보려고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영화는 물론 하나의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최근 있었던 시위와 물대포 피해자를 두고 말이 많다. 대개는 이미 어느 쪽에 서서 판단을 하는 편이다. 나오는 말 중에 “평화적인 시위를 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어떤 이는 이런 시점에 어떻게 모두 평화로 시위할 수 있느냐는 의견을 말하고, 어떤 이는 공권력에 비하면 또는 다른 나라의 시위에 비하면 이 정도 시위는 폭력에 끼지도 않는다는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비폭력적인 시위를 했다고 하면 그것은 과연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나타낼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폭력은 확실히 이중적이다. 우선 모든 폭력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분노와 폭력이 나쁘다면 하나님의 진노도 문제 삼아야만 한다. 분명히 허용되는 분노와 폭력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타당한 분노와 폭력이라도 거기에는 오염이 뒤따른다. 분노와 폭력은 목표가 불분명해지고 일반화되는 묘한 생리적 특징을 갖는다. 상사에게 억울함으로 화가 나면 화의 대상은 상사이지만 그 화를 오래 가지고 있을수록 대상은 불분명해지고 그저 주변에 걸리는 여러 대상에게 화가 퍼진다. 만만해야만 화를 낼 수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이 그런 의미겠다. 심지어 나중에는 곧 터지기라도 할 것 같은 펄펄 끓는 솥단지처럼, 분노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는 없고 오로지 들끓기만 한다. 화의 이러한 속성을 고려하여 성경에서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라는 권면을 했으리라.
다시 영화 ‘미션’으로 돌아가서, 침탈자들은 현지인이 야만인이라는 명분으로 그들을 몰아내는 것을 합리화한다. 영화는 제목대로라면 미션 즉 선교에 관한 영화이다. 그런데 선교가 복음이 전해지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영화의 앞부분은 제목에 걸맞지만 뒤는 어울리지 않는 주제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주 묘한 감흥이 생긴다. 결국 침탈자들은 비록 야만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말살하려고 한 셈이 되었다. 저항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다만 폭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둘로 나뉘었을 뿐이다. 영화 ‘미션’의 마지막 미션은 실패한 듯 보이나 사실 역사는 그렇게 간단히 마무리되지 않는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비폭력 시위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표현이 시위를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을 옹호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또한 생각한다. 시위에 직접 참가하시는 목사님이 추위에 고생하실까봐 남긴 나의 글에 아래 답장이 왔다. “모든 절차가 평화롭길 두 손 모읍니다. 분노가 그 어떤 폭력이 되지 않도록.” 진심으로 아멘.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미션
입력 2015-11-27 1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