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한 명을 키우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고 합니다. 밥값, 옷값, 숙박비에 대학 졸업 때까지 교육비를 포함하면 2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대학원까지 도움을 주고 혼수비용까지 마련하려면 산 너머 산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비용인데도 지불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부모입니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도 자기 부모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비록 내용은 다르더라도 말입니다. 문제는 자녀로 자랄 때는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날이 옵니다. 결혼해 자식을 낳아 키울 때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키우면서 자기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깨닫게 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돼서야 부모의 사랑과 마음을 몰라준 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주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은 일임을 아는 사람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 성장하고 어른이 됐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돈도 주지 않고 가방도 주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얻어먹는 ‘거지 전도여행’을 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특권을 주셨습니다. 어느 집에 가든 평안의 복을 빌어주는 권세입니다. 그들이 평안을 빌 때마다 놀라운 평안이 각 가정에 찾아옵니다. 혹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평안은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대단한 권세가 있겠습니까. 선포할 때마다 평안이 찾아온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손해 볼 일도 없습니다. 합당치 않은 사람들을 만날 때는 평안의 복이 내게 돌아오니 말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에 배가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시 109:17)’라고 합니다. 배만 아픈 게 아니라 내 복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미워하지는 않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주시리라.’(잠19:7)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께 감히 꾸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입니다.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작고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에 1000여명의 유대인을 구했지만 더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우리가 혹 한 명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사는 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1000여명을 건져낸 쉰들러가 그렇게 후회했다면 주님 앞에 서는 우리 모습은 어떨까 상상해봅니다. 설교만 하고 행하지 않는 목사가 될까 두렵습니다. 가난한 어린아이 한 명에게 마음을 쏟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위대한 일입니다.
김부일 목사(화전중앙교회)
[나눔설교] 주는 자의 행복
입력 2015-11-26 18:31 수정 2015-11-26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