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1993년 8월 12일 목요일 오후 7시45분. 마감시간을 넘긴 기자들에게 긴급 뉴스가 터졌다. 김영삼 대통령이 TV에 나와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표했다.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한다는 선언이었다. 청와대나 경제부처를 출입하던 기자들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YS표 깜짝쇼.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관가와 금융권에는 지금도 당시 금융실명제 도입과 관련한 뒷얘기가 넘쳐난다. 당시 금융실명제 방안을 만드는 실무진의 사무관이었던 최규연 저축은행중앙회장은 “89년 금융실명제 실시 준비단이 꾸려지고 검토를 끝내 결정 여부만 남았지만 저항이 심해 유보됐다”며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결단을 내려 도입이 가능했다”고 회고했다. 실무 준비를 맡았던 이들은 동료들은 물론이고 가족에게도 출장을 간다고 둘러대고는 강남에서 비밀리에 합숙하며 안을 만들었고, 막바지에는 정부과천청사와 가까운 곳에 아예 아파트를 빌려 ‘창살 없는 감옥’ 신세로 지냈다. 시장에서는 어느 대기업은 미리 대비했다더라는 뒷소문이 무성했다.
실명제가 시작된 다음 날 열린 주식시장에서는 주가가 폭락했다. 중소기업 돈줄이었던 사채시장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썰렁한 명동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예금 인출 사태나 금리 폭등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시장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효과는 컸다. 당시 재무부가 발표한 ‘금융실명제 실시 1주년 백서’를 보면 94년 6월 말 현재 실명전환율은 98%, 실명계좌 실명확인율은 92.4%였다. 가·차명계좌의 실명전환 실적은 총 6조2800억원에 달했다.
금융실명제는 문민정부의 ‘신경제’ 정책의 핵심이었다. 신경제는 경제·사회정의 실현과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금융·행정 개혁을 강조했다. 실명제로 비자금과 사채 등 지하경제가 커지는 것을 막고 과세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근간을 마련했다.
일본과 대만이 아직도 실명제를 하지 못하고 있고, 미국과 유럽도 법률로 명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YS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개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82년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 이후 실명제 도입 시도가 여러 번 있었으나 금융시장 위축 우려, 재계의 반발 등으로 번번이 실패했었다. 최근 들어 자금세탁 방지·테러자금 조달 근절이 국제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한국의 금융실명제는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전환기 맞은 금융실명제=실명제가 강력한 만큼 이를 피해가려는 시도도 많았다. 2005년 삼성그룹이 우리은행과 손잡고 차명계좌에 비자금을 묻어 두거나 상속 지분을 은닉해온 사실이 드러나 재계와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CJ그룹의 이재현 회장도 차명계좌의 비자금이 드러나 재판을 받고 있고, 올해는 신세계그룹이 1000억원대 주식을 임직원 명의 등 차명으로 보유해 온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실명제 도입 초기에는 실제 명의자와 빌려 쓰는 사람이 합의하면 차명계좌를 만들어 운영해도 불법이 아니었다. 실명확인의무는 금융기관에만 있었기 때문에 차명을 써도 고객은 적발됐을 때 가산세만 물고 형사처벌은 받지 않았다.
2001년 미국 뉴욕 9·11테러와 지난 13일 프랑스 파리 테러 등을 겪으면서 국제사회는 테러 자금 차단을 위해 금융계좌의 실소유 확인 절차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북한·중국은 물론 중동과도 거래가 활발한 편이지만, 22년 전 도입한 실명제 덕분에 신뢰를 지킬 수 있었다. 제도도 꾸준히 보완해 왔다. 지난해 11월 29일 개정된 금융실명제에서는 불법 재산 은닉, 자금세탁, 조세포탈, 강제추심 회피 등을 목적으로 한 차명 금융거래는 모두 불법으로 간주한다. 명의를 빌린 사람은 형사처벌을 받는다.
핀테크 시대가 열리면서 금융실명제도 근본적인 변화를 맞고 있다. 온라인 금융거래가 급속도로 늘면서 은행에 가지 않아도 실명을 확인하는 방식이 필요해졌다. 이미 다양한 비대면 실명 확인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내년에는 인터넷 전문은행도 등장한다. 핀테크 시대에도 금융실명제의 투명성을 지켜가는 것이 ‘21세기판 신경제’의 핵심과제인 셈이다.
박은애 기자 limitle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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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1-26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