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상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두근.” “아, 맞다. 예약주문 시에 오는 선물은 바로바로 라면과 양은냄비입니다.”
어느 블로거가 아주 친절하게, 재미난 문장으로 쓴 베스트셀러 추천기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지난 9월 김훈 작가의 신간 ‘라면을 끓이며’를 출간하면서, 작가 얼굴이 새겨진 양은냄비와 작가가 즐겨 먹는다는 라면을 예약 이벤트로 내놨을 때 쓴 글이다. 이 블로거가 ‘센스가 넘치죠?’라며 사뭇 칭찬했던 이 이벤트에 대해 출판유통심의위원회는 도서정가제(출판문화산업진흥법) 위반으로 판정했다. 메이저 출판사가 도서정가제 위반 판정을 받은 것은 이례적이다. 이 사건으로 세련되고 쿨한 이미지의 문학동네는 ‘양은냄비 출판사’라는 머쓱한 딱지를 붙이게 됐다.
문학동네의 경품 이벤트는 ‘도서정가제 1년’의 민낯을 보여준다. 도서정가제는 가격이 아닌 가치 경쟁을 통해 출판 생태계를 살리겠다는 취지로 시행됐다. 무분별한 할인경쟁이 결국 승자독식으로 귀결되며 중소형 출판사와 지역 서점의 줄도산 등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21일로 1년이 된 도서정가제는 반쪽짜리다.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이전에 책값의 19%(가격 할인 10%+경품 등 간접할인 9%)까지 가능했던 할인 폭을 15%(가격 할인 10%+간접할인 5%)로 줄였을 뿐이다. 여전히 깎아주고, 덤을 얹어주면 잘 팔리는 마트 상품 같은 것이다. 지식 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도서정가제 1년을 즈음해 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정가제 시행 후 지난달 말까지의 신간 평균 가격은 1만7916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2% 내렸다고 한다. 가격 하락이 매출 증대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책값 하락을 도서정가제 효과로 봤다. “과거 10여년간 올라가기만 하던 책값이 처음으로 꺾였다. 할인 폭을 줄인 것만큼 책값 거품이 빠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장기적으로 할인제도를 완전히 없애는 완전정가제로 가야 책값이 더 싸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전히 편법 할인 구멍이 많은 점도 문제다. 현행 제도의 허점을 파고 든, 제휴카드를 통한 편법할인, 대형 출판사의 세트 도서 홈쇼핑 판매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체부는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용할 때 책값 15%를 할인해주는 문화융성카드를 출시했다. 책은 깎아줘야 사는 것이라는 인식을 정부가 부채질하는 꼴이다. 정가제 안착에 대한 정부 의지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동네 서점을 살려보겠다는 취지라지만, 프랑스의 ‘반아마존법’처럼 온라인 서점 무료배송을 금지하는 더욱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도 이런 건 외면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도서정가제 위반 시의 제재다. 현행 시행령에서는 과태료 100만원에 그친다. 때려도 아프지 않을 솜방망이다. 있으나마나한 정가제 위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욱이 문체부와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도서정가제를 위반한 업체의 명단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일부 명단이 흘러나온 것에 대해 “직원 실수”라고도 했다.
지금 제도로는 이벤트다 뭐다 해서 계속 할인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격 경쟁을 지속할수록 출판시장에서 약자들은 사라진다. 결국 몇몇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과 출판사만이 기형적으로 커지는 시장에서 책의 다양성과 다양한 목소리는 사라질 것이다.
“경품 이벤트요, 우린 하고 싶어도 돈 없어서 못해요.”
편집자 2명에 불과하지만, 일본 전문 서적을 낸다는 자부심으로 버텨가고 있는 N출판사 사장의 일침을 정부는 새겨들어야 한다.
손영옥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내일을 열며-손영옥] ‘양은냄비 출판사’ 안 나오게 하려면
입력 2015-11-25 1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