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거리에 아파트에 나뭇잎 우수수… 가을비가 야속한 ‘젖은 낙엽’들

입력 2015-11-25 05:03

24일 오전 5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거리를 은행잎이 뒤덮고 있었다. 전날 비가 올 때 떨어진 것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들 자고 있는 시간에 환경미화원 강모(58)씨가 비질을 시작했다. 형광색 옷을 입고 안전모를 쓴 강씨는 긴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 모았다.

강씨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는 한참을 바라봐도 싫지 않은 잎이지만 바닥에 떨어지면 쳐다보기도 싫다”며 “미관상 낙엽을 쓸지 않고 놔두는 거리도 있는데, 이렇게 비가 내렸을 때 치우는 일은 고역”이라고 했다.

그는 낙엽수거용 황토색 자루에 쓸어 모은 나뭇잎을 담으며 말을 이었다. “10년째 미화원을 하고 있는데, 젖은 낙엽을 치우는 노하우 같은 건 없다. 나뭇잎 찌꺼기가 남지 않게 비질을 여러 번 더 하는 수밖에 없다.” 그가 묵묵히 쓸고 간 자리는 말끔해졌다.

비를 맞고 떨어진 낙엽은 골칫거리다. 젖어 있어 잘 쓸리지 않고 신발이나 옷에 붙으면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런 특성에 빗대 퇴직 후 하루 종일 집에 붙어 있는 남편을 ‘젖은 낙엽’이라 부르는 우스개도 있다. 별로 쓸모도 없는데 잘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는 뜻이다.

서울 중랑구의 아파트 경비원 김모(60)씨도 한때 ‘젖은 낙엽’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명예퇴직한 그는 4년간 집에 ‘붙어’ 있다가 2012년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김씨는 “20년 가까이 직장에 다니면서 두 아들을 대학에 보냈다. 은퇴한 뒤 몇 년 쉬었는데 집에만 있는 게 눈치가 보였다. 소일거리를 찾아서 시간도 보내고 생활비도 보태려고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파트 단지에는 은행나무 대추나무 등이 있고, 거기서 떨어진 낙엽을 치우는 것도 김씨의 일이다. 김씨는 가을에 오는 비가 “제일 골치 아프다”고 했다. “비가 내렸다 하면 힘이 약해진 나뭇잎이 한번에 우수수 떨어진다. 비 맞은 낙엽을 치우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쉬워서 새벽 같이 움직여야 한다. 새벽 시간에 미리 쓸어놓지 않으면 출근길에 주민들이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거리를 싱그럽게, 아파트 단지를 아름답게 하려고 심어둔 나무가 요즘 같은 가을비에 잎을 떨구면 그 젖은 낙엽을 치우는 것은 황혼에 접어든 ‘젖은 낙엽’의 몫이 돼 있다. 올가을은 유독 비가 자주 온다.

홍석호 기자 wi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