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들 비싼 유모차를 사는지 알겠어요.”
서울 노원구에 사는 이모(37·여)씨는 두 돌이 막 지난 아이와 외출할 때마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고 했다. 울퉁불퉁한 보도 위를 지나면 유모차를 끄는 이씨 손에까지 진동이 느껴진다. 보도블록이 깨진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이 머리가 흔들릴까봐 속도를 거의 내지 않는데도 유모차는 널을 뛴다. 100만원이 넘는 유모차는 진동이 덜하다는 주변 얘기에 이씨는 마음이 무겁다.
보도가 불편하기는 유모차뿐만이 아니다. 세그웨이 등 새로운 교통수단과 휠체어도 보도를 다닐 때마다 위험에 처한다. 보도를 점령한 상점 매대, 물품박스 등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차도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보행보조수단은 보행자로 분류돼 차도로 다녀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도저히 보도로 다닐 수 없어 차도로 내몰리는 일이 빈번하다.
보도를 포함해 보행시설에 대한 교통약자의 ‘체감온도’는 싸늘하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장애인, 영유아 동반자, 고령자, 임산부 등 교통약자는 2013년 기준으로 1278만명에 이른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25% 수준이다.
국토부가 일반인 493명과 교통약자 964명에게 보도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했더니 일반인은 68점(100점 만점)을 줬다. 반면 교통약자는 낙제점 수준인 53점을 매겼다. 장애인의 59.4%와 임산부·고령자의 51.0%는 보행시설의 개선이 가장 시급하다고 답했다.
보도블록은 꼭 필요할까
보도를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주범은 보도블록이다. 보행자가 불편을 호소하는데도 보도블록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서울시 보도환경개선과 관계자는 24일 “열에 의해 보도가 변형될 수 있고, 지열이 보행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보도블록을 사용하고 있다”며 “상수도 누수 공사 등 굴착이 필요할 때 보도블록은 일부만 들어내면 공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보도블록이 용이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보도블록은 깨지기 쉽고 가로수, 맨홀 등 다른 시설물과의 결합 부위를 깔끔하게 마감하기 어렵다. 편의성이 높지만 단점도 만만찮아 서울시는 겨울철 보도공사 최소화, 보도공사 실명제, 보도 파손자 원상복구 등 ‘보도블록 10계명’을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서울시설공단 관계자는 “맨홀이나 가로수는 모양에 따라 절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공할 때 품이 많이 들어가는 게 사실”이라며 “수시로 점검해 잘못 시공된 경우는 보완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보도엔 보도블록 말고 다른 걸 깔 수는 없는 걸까. 일본 도쿄의 경우 자전거도로에 쓰이는 투수콘(빗물이 스며드는 콘크리트)을 보도에 깐다. 이 때문에 보도가 평탄하다. 한국교통연구원 설재훈 선임연구위원은 “통행 편의를 우선한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수도관, 가스관 공사 때문에 뜯기 쉬운 보도블록을 깔았지만 예전에 비해 공사 빈도도 줄었기 때문에 투수콘을 까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도로교통공단 명묘희 책임연구원은 “보도블록은 저렴하고 깔고 뜯기 쉬운 장점이 있지만 보행자에게는 좋지만은 않다”며 “정부에서 고민을 해 대체재를 찾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보행자 우선 아닌 정책이 문제”
도로교통법 제8조 ‘보행자의 의무’ 조항에는 “보행자는 도로를 통행함에 있어서 법령을 준수하여야 하고, 육상교통에 위험과 피해를 주지 아니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보행자보다 차량이 우선인 우리 사회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보도에서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보행자를 위한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하동익 연구교수는 “보행자를 생각하고 도로를 깔아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차도를 먼저 깔고 나중에 남는 길을 보도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도로교통법 8조와 같이 자동차가 우선이라 보행자는 소통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꼬집었다.
교통약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는 것도 문제다. 교통안전공단 최병호 박사는 “휠체어나 유모차가 차도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운전자들이 속도를 늦추지 않고 빵빵거리는 게 우리 사회”라며 “교통약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교통약자는 보도와 차도 모두에서 방치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교통약자를 고려해 보도 폭을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지켜지지 않는다. 최 박사는 “보도 폭은 설계 과정에서 일정 수준으로 정해지지만 그 안에 전봇대, 가로수를 심거나 버스정류장을 설치하면 보도 공간이 없어진다”며 “도로 설계와 조경 설계, 가로등 설계를 각각 따로 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기획] “아가야, 미안해” … 울퉁불퉁한 보도, 유모차 덜컹덜컹
입력 2015-11-25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