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중략)”
공감과 배려를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시인의 질타는 울림이 느껴진다. 공감은 우리네 메마른 가슴에 냉수를 붓듯이 시원함을 준다. 때로는 아픈 배 쓸어주는 따뜻한 엄마 손 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공감이 있는 관계는 행복하다.
최근 리더십의 패러다임도 공감을 강조한다. 사모이자 기독교 관련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루스 터커는 리더의 특징을 ‘헌신’ ‘유능함’ ‘자기성찰’ ‘진실성’ ‘공감’의 5가지로 봤다. 그 중 특히 공감을 강조했다. 감성지수로 유명한 심리학자 다니엘 골먼도 리더에게 절실한 것은 새로운 리더십 기술이 아니라 공감 리더십이라고 했다.
필자도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할 때 ‘나눔’을 많이 한다. 훈련 중 반 이상은 ‘나눔의 시간’을 갖는다. 처음에는 지루했다. 늘 설교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경청이 힘들었다. 말을 지루하고 길게 하는 사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머리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상황을 그려보며 들었다. 그러자 몰입이 되고 열정이 생겼다. 공감을 하고 경청을 하면서 무언가 그 사람 속에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말라깽이 소녀 모모를 만나면 사람들은 삶의 기쁨을 되찾았다. 모모에게 특별한 치유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모는 공감하며 경청해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우애를 나누는 관계’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등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공감할 때 치유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는 남자 성도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가족 셀’이란 소모임은 남자 성도가 리더를 맡는다. 이들 중에는 일이 많기로 소문난 모그룹 직원들이 많다. 어떤 리더는 아예 회사에 보고하고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변화된 사람들이다. 공감과 경청은 새로운 발견을 선물한다. 변화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그들 속에 잠자는 거인을 깨우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공감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프랑스 파리의 테러사태가 위기의 대표적 단면이다. 프랑스의 국가이념은 자유·평등·박애다. 공감의 문화가 잘 형성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제3세계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참혹한 테러를 당한 프랑스는 수니파 근본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제는 피아(彼我)가 분명하다. 전 유럽이 난민에 대해 공감을 하지는 않는다. 공감이 테러를 당한 것 같다. 이것이 인본주의 공감의 한계인 것이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이 중심이다. 오염된 이성이 그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공감을 시도하다 상처를 받으면 금방 적대감으로 바뀌고 만다.
그러나 신본주의 공감은 그렇지 않다. 인내가 있다. 용서가 있다. 긍휼도 있다. 존중과 배려가 있다. 아가페 사랑이 있다. 지혜로운 분별도 있다. 사람은 살리고 사탄은 물리치는 능력도 받게 된다. 신본주의 공감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 공감의 능력을 가진 자들이 일어나야 한다.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권순웅 목사(동탄 주다산교회)
[시온의 소리-권순웅] 신본주의 공감론
입력 2015-11-24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