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좀 되돌아가지만 유학가기 전 일이다. 극동방송 조완순 PD가 장애인 환우 대상 프로그램인 ‘희망의 구름다리’를 맡았다며 방송진행을 내게 요청했다.
“안 됩니다. 경상도 사투리가 강한데 어떻게 진행합니까?”
“장애인선교단체연합회에서 선생님을 추천받았거든요. 일단 진행 멘트를 해보시고 결정하시지요.”
당시 황영일 편성국장 앞에서 심사를 받았는데 “목소리와 말씀 내용에 진정성이 있어 전문 진행자로 괜찮다”고 했다. 이때부터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92년 12월 31일까지 ‘희망의 구름다리’를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이 방송은 유학을 다녀와서도 계속했다. 지금은 ‘참 좋은 내 친구’란 프로로 바뀌었는데 요즘도 매주 화요일 ‘기독교와 장애인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 극동방송 진행자로, 칼럼리스트로 참여한 햇수가 무려 26년이 넘어 최장수 출연자 중 한 사람이 된 것이 감사하다. 당시 ‘희망의 구름다리’는 중증장애인의 사연 소개와 장애인의 정보 전달로 인기를 끌었다.
거동이 힘든 중증 장애인들은 라디오가 친구다. 특히 같은 장애인들의 소식과 정보를 접하며 마음의 위안과 의욕을 얻고 복음전파의 통로가 됨을 절감한다. 나는 이 극동방송을 진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KBS 제1라디오 장애인 대상 프로그램 ‘내일은 푸른 하늘’에도 매주 출연했다. 이후 유학을 가서도 KBS 해외통신원으로 미국 재활계 소식을 일주일에 한 번씩 방송했다. 미국의 장애인 교육과 선진 재활 정책도 소개했다.
이런 연유로 KBS에서 장애인 대상 ‘사랑의 소리방송’을 설립하며 세미나를 열 때 발제를 요청받아 한국을 방문, 미국의 장애인 전문채널 인터치방송을 소개했다. 이때 장애인대상 방송의 중요성을 역설, 지금의 KBS-3 라디오 탄생에 힘을 보탠 것은 보람으로 여긴다.
방송활동 덕분에 탄생된 것이 바로 당시 내가 출석하던 서울 능동 시민교회 희망부이다. 다운증후군 명수와 뇌성마비 은희, 두 명이 이 시민교회 주일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주일학교에서 완전 왕따였다.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받았다.
이를 보다 못한 나는 이 두 명의 어린이와 함께 ‘희망부’를 만들어 따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시초가 된 서울 시민교회 희망부는 점점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장애인을 위한 모범적 교회로 소개되고 있다.
이제 희망1부는 아동과 청소년 장애인이, 희망2부는 성인부터 장년 장애인이 예배를 드린다. 장애인만 98명, 교사 95명, 가족까지 모두 출석하는 교회로 이것이 시민교회 부흥의 초석이 되었다.
서울 시민교회는 현재 주간 보호작업시설, 보호작업장 등 장애인 재활과 복지, 선교의 요람이 되고 있어 그 첫 돌을 놓은 나로서는 정말 기쁘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선교재활학 교수로 임용 받은 천안의 나사렛대학교에 첫 출근해 보니 대학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아주 작고 시설도 열악했다. 건물도 달랑 1개동에 행정실과 강의실, 교수실 등 모든 것이 모여 있었다. 한국 나사렛교단에서 운영하는 이 대학에서 재활분야를 전공한 교수가 국내에선 없었기에 내가 임용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 학과를 만들고 초빙해준 나사렛대학교가 나로선 너무나 감사했다. 첫날 4층 교수실로 올라간 나는 거동이 불편한 근육이양증 학생의 전화를 받았다. 나와 상담을 하고 싶은데 계단을 못 올라온다고 했다.
난 1층에 내려가 학생을 업고 4층 교수실까지 올라왔다. 한국에서 그것도 장애인재활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장애인 장벽’의 현실을 절절히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종인 <9> 장애인 대상 라디오 방송에 26년 ‘최장수 출연’
입력 2015-11-25 1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