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복실] 기적을 넘어 기쁨 넘치는 나라

입력 2015-11-24 18:06

우리 동네 이웃인 그녀는 탈북한 지 7년이라고 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외동딸과 단 둘이 산다. 그녀는 가까운 친척에게 속아 인신매매돼 중국에서 8년을 살았다. 가까스로 탈출해 막상 남한에 와보니 북한이나 중국에서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살고 풍요로웠지만 주변 사람들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통일이 돼 북에 있는 가족들이 다 남한에 와서 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기원하며 사는 그녀지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들이 있단다.

경제발전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나 삶의 만족으로 연결되기는커녕 ‘헬조선’ 같은 자학적 언어가 인터넷상에서 만들어지고, 지난 14일 민노총이 서울 도심에서 주최했던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발생한 것처럼 불법적으로, 폭력적으로 의사를 표출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렇다. “왜 이렇게 분노가 많아요?” 북한의 순응하는 체제에서 오랫동안 살다보니 더 대조적인 현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지적은 국제기구 통계에서도 여실히 들어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5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삶의 만족도는 36개국 중 29위이고 10점 만점에 5.80점으로 평균 6.58점보다 낮다. 잘 산다고, 많이 배웠다고 행복으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3년 영국 기자 다니엘 튜터가 펴낸 우리나라에 관한 책인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저자는 잠시 경쟁을 멈추고 삶의 질을 돌아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말했다. 한국은 루저를 너무 쉽게 만든다고. 명문대 안 가고, 좋은 직장 안 가고, 의사 변호사 안 되면 다 루저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생기는 병이라는 것이다.

지난 13일 파리에서 발생한 이슬람 테러 사건에서 무고한 시민 수백명이 다치고 희생됐다. 프랑스도 20%가 넘는 청년 실업, 높은 세금, 치솟는 물가로 고통을 겪고 있지만 국가안보의 위기를 맞이해 온 국민과 야당, 시민단체가 한마음으로 조의를 표하며 단결해 대응하고 있다. 그 어느 나라보다 진보 진영의 힘이 세고 노조가 발달한 나라인 프랑스이지만, 국가적 위기가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통합의 계기가 되는 것을 보니 부럽기만 하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프랑스 경찰의 테러 대응은 그다지 신속하지 못했고, 대통령은 시민들과 함께 축구를 보다가 혼자만 빠져나갔다. 관람객들은 전반전이 끝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고 당황해 어찌할 줄 몰랐단다. 우리나라에서 유사한 일이 생겼다면 어떠했을까. 궁금해진다.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인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랭클은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에 대해서 말했다. 자극과 반응 사이 공간을 넓히면 행동을 선택할 시간이 많아지고 그만큼 행복해질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자아와 내적인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삶,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을 줄 아는 넉넉함도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을 넓히는 방안 중 하나일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을 만큼 이른 시일 내에 경제적으로 기적을 이뤘고 10대 경제강국이자 선진국이 됐다. 내 나라와 나의 삶에 만족하고 자부심을 가지면서 살아갈 때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고와 행동도 미래지향적으로 변화돼야 할 타임워치는 이미 울렸다. 현실에 대한 만족과 감사함이 가득한 삶에는 헬조선은 더 이상 파고들 틈이 없다. 이제는 갈등과 분노를 다 털어버리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 넉넉한 공간이 있는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기적을 넘어 기쁨이 넘치는 나라’가 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를 소망한다.

이복실 (숙명여대 초빙교수·전 여성가족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