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남긴 업적은 실로 크다. 그중에서도 끈질긴 민주화 투쟁과 과감한 적폐(積弊) 일소는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여야 정당과 주요 정치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대한민국 정치사의 큰 별이 졌다”고 추모하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정부가 성대하게 국가장을 치르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키로 결정한 것은 잘한 일이다. 장례기간인 26일까지 온 국민과 더불어 고인을 충심으로 애도해야겠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이 나라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쌍두마차 역할을 했다. 그를 빼고는 민주화 역사를 제대로 쓰기 어렵다. 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정권 연장에 불복해 민주당으로 적을 옮긴 이후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 강력하게 맞섰다. 무엇보다 그는 박정희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기치로 총재에 당선된 뒤 강력한 대여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집권세력이 그를 국회에서 제명하자 부마항쟁이 발생했고, 이는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사태로 이어졌다.
전두환정권 초기인 83년에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무려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함으로써 민주화운동에 또 다시 불을 지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해 85년 12대 총선에서 선명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를 앞세워 대통령 직선제 투쟁을 전개한 결과 87년 6·29선언이 나오도록 했다.
3당 합당을 거쳐 93년 집권한 김 전 대통령은 오랜 군사정권의 적폐를 청산하는 국정 개혁을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집단반발 위험성을 무릅쓰고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한 것은 그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를 계기로 군부 쿠데타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란 이름으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쿠데타와 거액 비자금 조성 혐의로 감옥에 보낸 것도 그의 결단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금융실명제 도입 역시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큰 업적에 속한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및 국정개혁 성공은 특유의 정치적 자신감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국회에서 제명을 당하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한 발언이나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대도무문(大道無門)은 암울한 시기 실의에 빠져 있던 국민들에게 희망의 등불 역할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훌륭한 정치 지도자라면 그처럼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국민 총의를 모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공(功)이 많으면 과(過)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차남 김현철씨의 국정개입 문제는 김영삼정부 후반기 국정 운영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정부 인사와각종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이유로 ‘소통령’이라 불렸다. 단순한 개입이 아니라 국정농단 수준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현철씨 비리는 정권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됐지만 아버지가 방관했으며 심지어 감싸기까지 했다. 대통령 재임 중 아들이 알선수재,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옥살이를 했으니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퇴임 직전인 97년 12월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다. 6·25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 불릴 정도로 국가와 국민을 무척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1년쯤 전부터 불길한 징조가 곳곳에 나타났음에도 무지와 게으름으로 방치한 측면이 있다. 대통령에게 경제는 안보 못지않게 중요하다. 경제 문외한이라 해서 결코 면피될 수 없다.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된 이후 북한과 줄곧 담을 쌓고 지낸 것도 과오에 속한다.
[사설] 김영삼, 민주화와 적폐청산 공로 자못 크다
입력 2015-11-22 1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