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였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6년 전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문병한 뒤 스스로 밝힌 것처럼 두 사람은 일생의 라이벌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다. 민주화 투쟁의 한 배를 탄 동지였지만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라는 야당의 양대 파벌을 각각 이끄는 서로의 최대 정적(政敵)이기도 했다.
◇민주화 투쟁 동지였으나 ‘물과 기름’ 사이=두 사람은 정치적 출발점부터 판이했다. YS는 경남 거제의 갑부집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했고 최연소 국회의원 타이틀을 달고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다. DJ는 전남 신안의 한 외딴섬에서 소작농 아들로 태어나 고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다.
YS와 DJ는 정치권력을 놓고 마주한 외나무다리에서 물러서지 않았지만 반독재 투쟁에선 손을 맞잡았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이끌면서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했다.
서로 갈라진 계기는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 협상이었다.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앞두고 서로 후보로 나서겠다고 했다. 결국 YS와 DJ는 각각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후보에게 정권을 넘겨줬다.
앞서 YS는 1968년 야당인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DJ를 누르고 승리했지만 2년 뒤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선 DJ에게 패배하는 등 맞대결 구도를 이어갔다. DJ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두 사람에 대해 “독재 앞에선 동지였으나 그 밖의 문제엔 물과 기름 같은 사이”라고 회고록에 기록한 바 있다. YS의 비서 출신인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도 22일 “두 사람은 한마디로 애증의 관계였다”고 했다.
1990년 DJ의 평민당을 제외한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 대선후보가 된 YS는 1992년 대선에서 DJ를 누르고 승리했다. YS의 우세로 끝나는 듯했던 경쟁 구도는 97년 DJ의 대통령 당선으로 호각세를 이뤘다.
이후 한보 특혜 비리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YS의 차남 현철씨 사면 문제도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꼬이게 했다. YS는 DJ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독설을 던지기도 했다.
두 사람은 2009년 5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조우했지만 서로를 외면했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독재’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이명박정부를 비판한 데 대해 YS는 “이제 그 입을 닫아야 한다”고 맞서기까지 했다.
◇DJ 서거 앞두고 풀린 ‘22년 구원(舊怨)’=YS·DJ의 정치적 구원은 2009년 8월 DJ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풀렸다. DJ가 눈을 감기 8일 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YS는 중환자실에 있던 DJ 대신 이희호 여사를 만나 위로했다. YS는 당시 ‘이제 (두 사람이) 화해했다고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했다. “(DJ와는)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도 했다.
DJ의 빈소를 찾아간 자리에서도 YS는 “화해도 경쟁도 40여년을 함께했는데 정말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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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1-22 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