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의료 선교사, 애니 엘러스] 한국 오는 배에서 만난 선교사와 도착 1년 만에 결혼

입력 2015-11-23 18:19 수정 2015-11-23 22:46
‘기독신보’ 1926년 6월 20일자 기사에 실린 엘러스와 남편 번커의 사진. 그들이 받은 교지가 담겨있다. 이용민 박사 제공
엘러스 선교사의 남편 번커의 모습. 이용민 박사 제공
1886년 5월 22일,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기 위해 애니 엘러스가 탄 증기선 ‘시티 오브 페킨(City of Pekin)’에는 그녀 외에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가는 길모어와 헐버트, 번커가 동행하고 있었다. 길모어는 기혼으로 부인을 대동하고 있었고 헐버트에게는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메이 한나(May Belle Hanna)라는 애인이 있었다. 헐버트는 1888년 9월 뉴욕에서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번커는 독신에 애인도 없었다.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엘러스와 번커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었다. 다소 지루한 배 안에서 오랜 여정을 함께 지내며 같은 나라 같은 장소로 가는 일행이 나눈 첫 인사 이후의 교제들을 떠올리면 정확한 단서는 없지만 짙은 사랑의 혐의에 대한 심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배 위에서부터 들떠 있었다. 그녀의 회고 속에 많은 내용이 함축돼 있다.



“증기선에서는 얼마나 들떠 있었는지! 또 얼마나 이렇게 순박하고 무턱대고 대담하기만 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위대하고 놀라운 상상들과 열망들과 희망들과 기대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인지!”(Annie Ellers Bunker, “Personal Recollections of Early Days,” Within the Gate, 1934, 58.)



내한 선교사들의 결혼과 관련하여 길모어 헐버트 번커는 각각 전형적인 패턴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길모어처럼 미리 결혼을 하고 부인 또는 남편과 함께 내한한 경우, 헐버트처럼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본국에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던 경우, 번커처럼 선교지에서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경우의 세 가지가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결혼 방식이었다.

따라서 결혼 적령기를 맞이해 내한한 미혼의 남녀 선교사들이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결혼까지 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독신보다는 안정적인 가정을 갖도록 장려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애니 엘러스와 번커의 사랑과 결혼이었다.



선교사의 결혼에 관한 사례들

이런 일은 이미 다른 나라 선교지에서도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었던 현상이었기 때문에 미국 북감리회 해외여선교부의 경우, 독신 여성을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최소한 5년 이내에는 결혼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조건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기대에 따른 명분적인 조건에 불과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실례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알렌의 경우 언더우드의 사역을 위해 엘러스가 언더우드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엘러스의 후임으로 내한한 릴리아스 호튼 의사와 결혼하였다.

또한 엘러스의 후임으로 정동여학당을 맡은 메리 헤이든은 다니엘 기포드와 결혼하였고, 그녀의 뒤를 이어 내한한 수잔 도티는 나중에 다시 프레드릭 밀러와 결혼하였다. 헤론이 갑자기 죽고 나서 미망인이 된 헤론 부인은 제임스 게일과 결혼하였으며, 이화학당을 위해 교사로 내한한 마거릿 벵겔은 조지 존스와 결혼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결혼 또는 재혼과 관련된 일은 상당히 많았다. 그 결과 3∼4대에 걸친 선교사 가족들의 역사 안에는 나름대로의 복잡한 혈연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아직 없다.



엘러스와 번커의 사랑에 관한 단상

애니 엘러스는 1887년 1월 번커와 약혼을 하고 후임 여의사가 오는 대로 결혼식을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번커와 함께 힘을 합하면 보다 더 선교 사역을 지혜롭게 해나갈 수 있겠다는 기대였다. 번커는 엘러스에게 그녀의 진실한 기독교 신앙을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순진했던 그녀는 이런 ‘뻔뻔한’ 고백에 넘어가고 말았다. 번커가 엘러스에게 했던 고백은 요즘도 신학생들이 자주 써먹는 ‘수법’이다. 엘러스는 번커에 대해 유능하고 훌륭한 기독교 교사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결혼의 가능성이 보였다’ 라고 했던 1887년 3월 7일자 편지 내용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건데 이미 한국으로 오는 배 위에서 대강의 결정이 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둘은 종종 한강이나 궁궐 근처로 데이트를 다녔다.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함께 사역할 것을 기대하며 번커를 남편으로 맞이했다.



엘러스와 번커의 결혼식 풍경

엘러스와 번커의 결혼식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자료는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7년 7월 5일자 편지이다. 다음 아래의 내용은 그 편지에 기초하여 재구성하였다.



애니 엘러스와 달젤 번커의 결혼식은 1887년 7월 초순 화요일 저녁에 알렌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주례는 육영공원의 교사 길모어 목사였다. 약 50장의 초대장이 당시의 모든 주한 외국인들과 조선인 귀족들에게 배부되었다. 이 결혼식은 서울에서 열린 첫 외국인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았다. 초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에 결혼식은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왕실에서 보내주고자 했던 악단은 정중하게 사양했고 결혼잔치는 생략했다.

보름달이 비추이는 서늘한 여름밤의 결혼식이었다. 예식장의 중심에는 임시로 설치한 분수가 꽃들 가운데 있어서 주변의 청사초롱들과 어울려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러시아 공사의 아들과 세관 직원의 딸이 신랑신부가 행진하는 길 위에 꽃을 뿌려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는 가마를 타고 새롭게 마련된 신혼집으로 향했다. 신혼집은 조선 왕실에서 금팔찌 금반지 세트와 더불어 선물로 준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비단, 식기, 차 세트, 커피 세트 등 다양한 선물들을 보내왔다. 모두가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그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새 출발을 시작하였다.

이용민 박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