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인 <6> 88장애인올림픽, ‘복지정책 연구’ 새 진로 계기로

입력 2015-11-22 18:29
유희상 선수가 우승한 1987년 오이타국제휠체어 마라톤대회의 김포공항 환영식. 중앙이 홀트선수단장으로 참가한 김종인 교수.

88서울올림픽과 함께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88서울패럴림픽)도 열렸다. 이 때까지 장애인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던 국민들이 한국에 모인 세계 각 국의 장애인들의 의욕적인 모습과 시합광경을 보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을 하게 됐다. 또 사회복지에 영향과 도전을 주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패럴림픽에 어떤 종목이 있는지조차 모르다 주최국으로서 체면을 지켜야 하기에 장애인스포츠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는 장애인이 가장 많이 사는 우리 시설에서 ‘홀트선수단’을 창단하자고 미리 제안해 감독을 맡았다. 그래서 1986년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 장애인아세안·극동게임과 87년 일본 오이타 국제휠체어 마라톤에 선수들을 이끌고 참여했다. 이때 유희상 선수가 하프마라톤에서 우승했다.

홀트스포츠선수단은 중증뇌성마비 장애인 스포츠종목인 보치아 종목을 선택해 집중훈련을 했다. 최고동, 송경수 선수는 둘 다 일반휠체어를 혼자 탈 수 없는 1급 중증 뇌성마비장애인인데 보치아 경기는 신체적 재활효과가 컸다.

난 이들을 선수로 연습시키면서 재활효과까지 나타나는 결과를 기록해 ‘장애인 스포츠가 재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도 발표했다. 최고동 씨는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서울장애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 국위선양과 함께 체육연금대상자가 되어 지금도 혜택을 받고 있다.

서울장애인올림픽개막이 3달 정도 남았을 당시 홀트아동복지회 김한규 회장님이 나를 호출했다. “김종인 과장, 내가 88장애인올림픽 실무부위원장을 맡았는데 당신이 문화예술부분 장애인작품전시회를 좀 맡아 주세요.”

갑자기 장애인작품전 담당관이 된 나는 시각장애인이 만든 도자기, 발로 짠 모자, 입으로 그린 동양화 등 재활극복의지가 담긴 600여점의 작품을 장애인올림픽기간에 전시했다. 연 인원 10만명에 달하는 국내외 인사가 관람해 성황을 이뤘다. 서울패럴림픽(영문판)소식에 ‘한국장애인예술가들의 영혼의 걸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았으며 국내외 언론에도 30여차례 보도돼 장애인올림픽이 체육행사만이 아니라 문화행사로서의 위상도 드높이는 창구가 되었다.

장애인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그동안 집에서 움츠려 지내던 장애당사자의 욕구가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이 장애인올림픽 국제행사는 집이나 시설에서 격리되어 있던 장애인의 자존감을 높이 세워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가 결성돼 법인화 작업에 들어갔다. 장애자(者)를 장애인(人)으로 바꾸어달라는 장애당사자의 목소리를 함께 높였다. 장애인수를 정확히 파악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하는 한편 장애등록제의 필요성을 정부와 장애인 모두에게 요구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89년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하게 된다. 나는 이런 여러 가지 장애인 문제에 관여하면서 장애인올림픽을 계기로 새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가 홀트의 현장사역을 마감하고 이제 또 다른 장애인재활복지정책과 제도에 헌신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홀트의 김한규 회장이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이곳을 사임하게 되면서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을 함께 열자고 제안한 것이다. 갈등도 있었지만 홀트라는 울타리보다 아직 초보 단계인 한국 장애인문제에 더 열정을 쏟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란 확신이 있었다. 나는 새롭게 문을 연 연구원의 상임이사와 사무국장으로 장애인관련법과 제도개선을 포함한 사회복지정책 개발에 헌신하게 되었다. 이 분야의 일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2년 여름, 말리 홀트 여사가 전화를 걸어 꼭 만나고 싶으니 일산으로 와 달라고 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