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의결제도 명암] 처벌 대신 시정… 또다른 ‘기업 면죄부’ 걱정
입력 2015-11-20 19:19 수정 2015-11-20 21:56
“사적 계약의 융통성과 최종판결이라는 법적 권위를 결혼시킨 것이다.”
미국의 공공정책 전문 연구기관인 후버재단 소속 경제학자 리처드 엡스타인이 ‘동의의결’ 제도에 대해 내린 정의다. 그의 설명대로 동의의결제도는 기업의 불공정행위로 인해 발생한 소비자와 중소사업자의 피해를 신속히 구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해당 행위의 위법성을 판단하지 않고 기업의 자발적 시정과 구제를 원칙으로 사건을 종결한다.
지난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는 국내 포털 사업자인 네이버와 다음의 동의의결을 최종 승인했다. 우리나라에서 동의의결을 한 첫 사례다. 그리고 1년6개월이 흘렀다. 이후 SAP코리아가 계약 해지건, 마이크로소프트가 기업결합건으로 동의의결 사례를 추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동의의결제도에 대한 긍정적 여론보다는 부정적 시각이 많다. 법적 처벌이 없는 만큼 기업에 면죄부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네이버·다음 자발적 시정 조치 이행 수준은=우리나라 첫 동의의결 사례인 네이버와 다음은 인터넷 온라인 검색 광고가 문제가 됐다. 공정위는 키워드 광고의 불명확한 구분, 대행사 이관제한 정책 등을 지적했다. 동의의결에 따라 네이버와 다음은 지적된 사항의 표기 방법을 변경하고 메인 화면에 1개월간 이 같은 내용을 공지했다. 시정안과는 별개로 구제안을 통해 네이버와 다음은 각각 3년간 1000억원과 40억원을 투자해 공익법인 설립이나 소비자 수행 제고, 피해구제 기금 출연 등에 쓰기로 했다.
시정안으로 내놓은 전문서비스 구분 표시와 키워드 광고 구분 표시는 완료한 상황이다. 신규광고 영역에 대해선 우선협상권 등의 요구 행위를 중지했다. 그렇다면 구제안으로 제시한 천문학적인 돈은 제대로 쓰였을까. 1000억원을 내놓겠다고 한 네이버의 경우 동의의결 최종 승인이 나기도 전에 의혹이 제기된 상태였다.
지난해 김기식 의원은 “1000억원 중 중소상공인 희망재단의 500억원 출연은 이미 네이버가 2013년 9월 중소기업중앙회와 기금 조성을 약속한 것”이라며 “공정위가 구제안을 부풀린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어찌됐든 네이버는 구제안으로 내놓은 약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입장이다.
업계 관계자들도 “공정위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다”며 “네이버도 국회와 공정위의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공정위가 지난 9월 신용학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네이버는 3년간 200억원을 투자해 설립하기로 한 공익법인에 대해 올해와 내년 50억원씩 출연키로 했다. 소비자 후생과 중소사업자 상생에 쓰겠다는 300억원 중 약 200억원은 올 상반기 소비자 교육과 공익 캠페인, 중소사업자 홍보와 판로 지원 등에 사용했다. 다만 중소상공인희망재단에 출연할 계획인 500억원은 지난해 100억원을 지원한 뒤 중단된 상태다. 재단 내부 직원들의 비리로 재단이 미래창조과학부 감사를 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네이버 관계자는 “우리는 약속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공정위에서 모든 이행 과정을 점검하고 있다”면서 “지금은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문제는 네이버의 이행이 소비자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네이버에는 광고와 광고 검색어, 키워드가 오르내리고 있다. 네이버의 주요 광고주인 꽃집, 퀵서비스 등 중소상공인들은 직접적 혜택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특히 공익법인 설립과 소비자 등 상생지원 기금은 공정위가 관리 주체고 운영은 법인에서 하기 때문에 네이버도 기금만 출연할 뿐 사용처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이봉의 교수는 “기업은 자신의 과실을 구제해주는 대신 기금을 내놨다. 그런데 이 기금이 해당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으로 알려지고 있다”면서 “구제안으로 내놓은 기금은 그 기업이 직접 운영해 소비자 피해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통 3사, 소비자 피해 직접 보상할까=공정위는 최근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로 이동통신 3사가 동의의결 신청서를 제출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이통사는 LTE 요금제와 관련해 특정 요건에는 요금이 과금됐음에도 ‘무제한’이라는 표현을 써서 공정위로부터 위법성 여부를 조사받고 있는 상태다.
기존의 3건과 달리 이통 3사의 사안은 소비자 피해와 직결된 만큼 동의의결에 따라 소비자 피해를 구제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이전의 네이버나 다음은 광고 관련 사안이었고 SAP는 계약 해지, MS는 기업 결합이 동의의결을 신청한 이유였다.
공정위 관계자는 “과징금은 국가에 귀속된다. 네이버나 다음이 구제안으로 내놓은 돈은 공익법인 설립 등에 사용됐고 소비자 상생 지원도 공익 캠페인이나 중소사업자 지원을 한 게 전부”라며 “이통사의 경우 소비자 피해를 인정하면 피해를 보상하는 등의 실질적 후속 조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공정위는 2006년에도 SK텔레콤, KT, LG텔레콤 등 이통 3사가 무제한 정액·커플 요금제를 담합·폐지했다며 17억82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이처럼 유사 행위에 대해 이통 3사가 동의의결을 신청한 데는 이유가 있다. IT 기업의 특성 때문이었다. 소비자를 직접 만나는 IT 기업들로선 이미지가 중요하다. 시간을 끌며 법적 다툼을 해서 이겼더라도 기업 입장에서는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대처하는 데도 동의의결제가 맞는다고 판단했다. 앞서 3건이 모두 IT 기업인 이유이기도 하다.
공정위는 조만간 동의의결 신청의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를 거친 뒤 위원회를 구성할 예정이다.
세종=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