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화가의 길은 험난하고 가난하며 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예술가로 위대한 성취를 이룬 분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못한 채 안타깝고 아쉬운 결말에 이른 수많은 무명작가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삼재’라고 꼽히는 심사정(1707∼1769)은 사대부 출신으로 두루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할 때는 장례 치를 비용조차 없었다. 김홍도(1745∼?)도 어진을 그리고 충청도 연풍 현감까지 지냈으나 만년엔 병고와 가난으로 시달렸다.
서양도 근대의 경우 예외는 아니다. 반 고흐(1853∼1890)의 애달프고 고독한 삶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다. 얼마 전 ‘누워있는 나부’의 낙찰가로 화제에 올랐던 모딜리아니(1884∼1920)는 뜨거운 탐미를 추구했지만 마약과 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만 해도 교회나 권문세가들이 작품을 주문해 생계 위협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는 작가들에게 붓 한 자루를 들려 삶의 전쟁터로 내던졌다. 새로운 실험과 창조가 요구됐지만 이는 동시에 자유이자 구속이었다. 반 고흐가 생전 한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이 얼마나 가없이 고달팠던가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이런 고난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화가 백철극(1912∼2007)의 일생은 그의 차남 백중필 선교사(캄보디아 라이프대학 부총장)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백철극은 1912년 5월 16일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나 4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영화관 간판을 그리며 학비를 모았다. 어머니는 길쌈으로 그를 도왔으리라. 35년 일본 니혼대 회화과에 입학해서는 전차운전사, 신문배달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학비를 모았다. 당시 대학 1년 선배인 김환기 화백과는 절친하게 지냈다. 백 선교사는 김환기가 그 때 아버지에게 보낸 엽서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당시 모든 화가들이 그랬듯 그도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 가는 소망을 안고 있었다. 우선 상해로 간 그는 일본미술인협회가 주관하는 공모전에서 특선을 받고 결혼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결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결국 49년에 귀국하였으나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해 그의 가족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토록 그리고 싶은 그림이지만 삶의 현실은 늘 막곤 하였다. 2남 3녀를 거느린 가장은 67년 캐나다로 이민,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유랑했다. 그럼에도 가고 싶은 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리는 아버지가 때론 원망스럽기도 했다고 백 선교사는 고백한다. 그러나 고난 중에도 예술을 위해 몸부림친 백철극의 삶은 훗날 아름다움으로 되살아났다.
아버지의 작품을 들고 한국에 온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을 소장케 하고 2012년 ‘백철극 화백의 삶과 그림전’ 2014년 ‘백철극 회고전’을 열었다. 굳건한 믿음과 기도로 이 일을 해내고 있어 내게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 상해에서 찾아낸 ‘만세관’ 얘기는 감동적이다.
작품 ‘무제’는 작가의 수준이 뛰어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형상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를 뛰어넘는 예술적 직관에 맞닿아 있다. 평생의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고 화집도 내고자 ‘백철극 화백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많은 이의 동참을 기다리고 있다. 떠도는 예술혼을 고국에서 꽃 피게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석우 (겸재정선미술관장·경희대 명예교수)
[이석우 그림산책] 떠도는 예술혼, 고국에 피어나게 하라
입력 2015-11-20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