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의 한 대목이다. 통속에 따라 그저 그렇게 세월을 살다보면 이렇게 두런거리듯 인생을 마감한다.
여기 여인들이 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고 말하는 여인들이다. 지난 12일 전남 보성 복내전인치유센터에서 쇠약한 이들을 만났다. 천봉산 아래 치유센터는 바람 한 자락, 구름 한 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에덴의 원시성을 그대로 간직한 자연 속에 자리했다. 스스로 자, 그럴 연. 여기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했으므로 곧 창조주 하나님이다.
가을이 깊었다. 하지만 남도의 가을은 중부지방과 달리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지 않는다.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우수수 잎을 털어냈다.
치유센터 암환자 숙소 ‘평화의 집’ 사람들이 이날 가을 산책에 나섰다. 하루 두 차례 실시되는 센터 프로그램 ‘걷기’. 그 길은 3㎞ 길이의 ‘영성의 길’이다. 센터 측이 설치한 스피커에서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깔렸다. 이 길을 암환우 30∼40명이 이용한다. 몸과 영이 이 길을 걸으며 하나님 생태 속에 흡수되는 산책이다.
이날 우리는 등산 스틱을 하나씩 쥐고 각자의 방식에 따라 영성의 길로 나섰다.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가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존재함을 확인시켜 준다. 환우들은 소리, 향, 맛, 감촉 등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것들에 절실하다.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통증마저도 감사하다.
김성경(이하 모든 인물 가명·52) 집사. 대구 미8군 레스토랑에서 29년을 근무했다. 세련된 멋쟁이다. 귀에 착착 감기는 대구 사투리가 매력적이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든든한 직장에서 노후 대책까지 잘 설계해 놓은 ‘똑순이’이기도 했다. 콧대 높은 이 여인, 40대 들어 열두 살 연하남과 ‘결혼하는 사고’를 쳤다. 늦복 터졌다. 부부는 입이 귀에 걸렸다. 자녀는 없다.
나만 즐거웠고, 나만 행복했다
어느 날 건강 검진을 받았다. 유방암이었다. 2㎝ 크기의 악성 종양이 있었다. 항암 치료를 받았다. 여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제주도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통증이 무섭게 제 몸을 파고들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당신을 간절히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자복했다. “나 혼자만 당신을 영접했습니다. 가족과 직장 동료들을 당신 앞에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우상 숭배에 빠진 그들을 버려두고 당신 앞에서 나만 즐거웠고, 나만 행복했습니다.”
박우란(50) 선교사. 7년을 캠퍼스 사역하고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 선교사로 갔다. 그곳에서 7년, 캐나다에서 3년, 미국에서 4년을 보냈다. 2002년 어느 날 사역지에서 한국 의료선교팀에 의해 간 혈관종이 발견됐다. 그 암세포는 피와 뼈에까지 번져 있었다. 그럼에도 사역지를 떠날 수 없었다. 기도에 의지해 가며 암세포와 싸웠다.
“주님이 몸을 통해 쉬라고 사인을 주신 거죠. 사인이 없었으면 안 쉬었겠죠. 내 몸의 암세포도 원래 착한 세포였을 겁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외부 바이러스와 싸우다 변형됐겠지요. 지금처럼 이렇게 하나님 품속에서 쉬고, 빛을 쬐고, 진동을 느끼게 해주었으면 그렇게 변형되어 나를 공격하지 않았겠죠. 불쌍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경기도 광명시에 산다는 이송현(63)씨. 식도암 환자다. 암 통보를 받고도 울고불고 하지 않았다고 하는 담대한 여인이다. ‘아 내가 내 몸을 너무 소홀히 했구나’ 생각하고 스스로 입원하고 짐을 챙겨 이곳까지 왔다. 7년 전 남편과 사별했고 딸 셋을 시집보냈다. 살만 하니 암이라는 못된 친구가 찾아왔다. “여기 와서 교회 생활이라는 걸 처음 했어요. 저는 사랑이란 주거나, 받는 걸로만 알았어요. 나누는 것임을 여기서 처음 알았어요.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거와 차원이 달라요. 여기서 만난 환우들이 동기간 같아요.” 그는 건강이 회복되면 소외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영성의 길은 오르막도 있었고 내리막도 있었다. 햇볕 따스한 양지가 있는가 하면 맞바람만 몰아치는 음지도 있었다. 나비가 안내하는가 하면, 뱀이 스르륵 지나가는 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느 한철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었다.
산책길 여인 7∼8명은 몸 상태에 따라 동행하기도 했고, 따로 걷기도 했다. 수다가 이어졌고, 아무것도 아닌 얘기에도 웃었다. 휴대전화 등과 같은 문명의 이기가 없어 세상이 궁금할 법도 하나 누구도 묻지 않았다.
성경씨가 송현씨에게 “남자 친구라도 만들지 그랬어요” 하고 물었다. 송현씨가 “남자에 관심이 없었어. 귀찮아”라고 답했다. 성경씨는 특유의 사투리로 “누가 와서 엎어져 봐요. 재밌어. 떠받들어 주는 사람 만나면 얼마나 좋은데”라고 했다. 소녀들같이 까르르 웃었다.
사랑 베풀고 갈 기회를 주소서
채하경(53) 집사. 역시 대구에서 왔다. 학교 교사인 그는 남편 병 수발을 위해 휴직했다. 평생 공직자로 살아온 남편이 덜컥 담도암에 걸렸다.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남편이었다. 일에 ‘미쳐’ 사는 한국 남자의 전형이었다. 자식들이 저절로 자라는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반면 하경씨는 ‘아들 바보’였다. 하경씨는 “12년 전 아들이 나를 전도해 교회에 다녔다”고 했다. “온 가족이 성경책 끼고 교회 출석하는 걸 보면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고 말했다.
지금은 온 가족이 신앙을 가졌다. “내 남편이 11년 만에 주님 앞에 가까이 왔다”며 “암에 안 걸렸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것이고 기쁨을 몰랐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내 남편은 굳건하게 주님을 붙잡고 이겨 낼 겁니다. 버텨 주는 남편이 감사하죠. 이 모든 일을 주님이 하셨군요.” 눈물을 흘리며 말했으나 얼굴에 기쁨이 넘쳤다.
산길이 넓어졌다. 공터 같은 장소였고, 멀리 보성강으로 들어가는 지류 물빛이 빛났다. 여인들이 멈춰 섰다.
아. 버. 지∼, 아. 버. 지∼ 아. 버. 지∼.
여인들은 목청껏 주님을 불렀다. 산울림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당신만 들었다. 여인들은 한동안 그렇게 먼 산을, 먼 강을, 먼 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고 기도를 했다. 조용했다. 바람 소리도, 새소리도 멎었다.
산책 끝나는 길에 ‘여인의 신랑’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경씨 남편 여광염(56)씨. 24시간 아내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행복한 남자다. 그는 고위공무원으로 직업상 바빴다. 평생 새차 한 번 몰아본 일 없다. 늘 중고차였다. 아내 손에 이끌려 음악회에 참석해도 몸에 밴 습관처럼 입구 좌석을 잡는 남자였다. 혹 사고라도 나면 즉각 시민들을 위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일에 빠져 산 남편이었다. 아내는 병마로 퇴직한 남편에게 새 차를 뽑아주었다.
“나는 지난해 6월 15일 처음 교회에 나갔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장인 장모의 소중한 딸을 데려오면서 감사함이 없었습니다. 이런 아내를 보게 해주신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살려 달라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베풀고 갈 기회를 주십사 하는 겁니다.”
복내전인치유선교센터
1995년 설립된 전인치유프로그램에 의한 암치유 중심의 선교 현장이다. 예배와 상담을 통한 내적치유에 무게를 두고 요양, 영양, 온열, 운동, 해독, 예술 요법을 적용하고 있다. 전남대병원, 광주기독병원, 안양 샘병원 등과 연계 진료를 한다.
보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이야기] “살려 달라는 게 아닙니다. 사랑 나누고 갈 기회 주세요”
입력 2015-11-20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