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2013년 1월 10일 아침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늘어선 검정색 승합차들. 잠시 후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남자는 그의 이름을 묻더니 한 장의 종이를 펼쳐보였다. 수색 영장이었다. 그리곤 읽어 내려갔다. 그의 귀엔 한 구절도 들리지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6시간 동안 집은 쑥대밭이 됐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긴급체포 됐다. 며칠 후 뉴스를 들었다. 자신이 국내 탈북자 신상을 북한에 제공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날이었다.
처음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명(名)은 변했다. ‘국가기관에 의한 간첩 조작 사건’. 지난달 29일 대법원은 일명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피고인 유우성(35)씨에 대해 간첩혐의 무죄를 최종 선고했다. 재판장은 딱 한 마디로 판결을 마무리했다. “기각합니다.”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신촌로 한 카페에서 만난 유씨는 최종 선고일을 떠올리며 “판사의 그 한 마디를 들으려고 그렇게 힘겨운 날을 지나왔나보다”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예상보다 밝아보였다. 차림새도 말끔했다. 혼자였다면 벌써 ‘간첩’이 되어 감방에서 잊혀졌을 거라고 했다. 변호사들과 목회자, 신부들에게도 고마워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자신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올 4월엔 그를 변호하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김자연(34) 변호사와 결혼하기도 했다. 유씨는 가족사랑 덕분에 살아간다고 했다. 그는 1심 재판을 받으며 구치소 독방에서 8개월을 지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고 기도했다. 하나님 외엔 말할 상대가 없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는 말씀을 붙잡았다.
2010년부터 교회를 다닌 그는 이번 시련을 겪으며 믿음이 더 자랐다. 현재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는 그는 다음달이면 공부를 마친다. 앞으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도우며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화교 출신으로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그는 2004년 탈북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법무부에서 강제추방 검토 얘기가 나왔다. 연락받은 게 있나.
“없다. 결혼해서 가족까지 생겼는데 강제추방을 한다면 어디로 하겠다는 것인가. 중국? 중국은 이제 갈 수 없다. 그럼 북한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나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냥 바다에 빠져야 하는가. 뉴스 댓글을 보니 나를 ‘국민 세금을 탕진한 당사자’라고 비판했더라. 착잡했다. 아직까지 국정원이나 검찰 어디로부터도 사과를 받지 못했다. 언론사 역시 마찬가지다. 대법원 판결이 끝나긴 했지만 형사재판이 끝난 건 아니다. 지난해 5월 검찰이 추가 사건을 재기소했다.”
-가족도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들었다.
“여동생은 여전히 트라우마 속에 있다. 지금도 뉴스에서 내 얼굴이나 이름이 나오면 울면서 힘들어한다. 동생은 6개월 동안 국정원 조사실에 갇혀 있었다. 창문 없는 방에서 CCTV의 감시 속에서 먹고 자며 했다. 동생은 탈북 후 2012년 10월 합동신문센터에 들어가 강압과 폭행에 시달렸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우리 남매는 ‘가족 간첩단’으로 둔갑했다.”
-재판받는 동안 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했다는데.
“항소심 이후 일을 하고 싶었다. 뭐든 일을 해야 벌금이라도 내겠다 싶어서였다. 이력서를 쓰고 회사에 지원을 했는데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면접 과정에서 신분이 밝혀지면서 탈락했고, 면접을 마치고 혹시나 해서 내 사정을 얘기하면 갑자기 회사로 세무조사가 나올 수 있다며 거절했다. 어떤 회사는 서류와 면접은 통과했는데 출근 전날 갑자기 관계자가 연락을 했다. 그는 ‘직원들이 반대한다’며 미안해했다. 왜 반대하더냐고 물으니 ‘그런 사람과 일하는 게 공포스럽다’고 했다 한다. (한숨)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요즘은 대학원에 다시 다니고 있는 게 전부다. 다음달이면 과정이 모두 끝난다. 졸업하면 막막하다. 진짜 백수가 되는 거다.”
-소송 과정에서 돕는 손길이 있었다.
“가족이 제일 큰 힘이 됐다. 아내를 비롯한 변호사들이다. 그들은 3년간 무료로 변론했다. 변호사들은 자신의 돈을 들여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고, 내가 어려울 때 십시일반으로 모금을 해서 생활비를 대기도 했다. 목사님과 신부님도 감사하다. 특히 A목사님은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다. 그는 내가 구속될 때부터 교회 전도사와 함께 1주일에 한두 번씩 꼭 구치소를 방문해 성경이나 책을 넣어주시고 외부 소식을 전해주셨다. 목사님께서 자주 하신 말이 있다. 고린도전서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신다. 감당키 어려우면 하나님이 가져갈 것이다. 중도에서 쓰러지지 말라’는 권면이었다. 한 번은 조사를 받다가 심장쇼크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10시간 넘게 깨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힘든 시간을 버텨낸 게 그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언론보도 내용이 아니라 직접 파악한 팩트와 진실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고 나를 믿어줬다. A목사님은 내 동생까지 챙겨주셨다. 그는 이번 대법원 판결 때에도 와주셨다.
-구치소에서 매일 일기를 썼던데 어떤 내용을 담았나.
“2014년 1월 18일부터 8월까지 썼다. 분량은 노트로 5권정도 된다. 당시엔 하루하루 나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됐다. 독방을 썼는데 아무도 말할 사람이 없었다. 유일한 대화는 기도였다. 매일 기도를 드리고 그 내용을 적었다.
자주 기도한 내용은 나의 억울함이 속히 밝혀져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했다. 그렇지만 구치소엔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더 자세히 일기를 써서 기록했다.”
-구치소에서 책도 많이 읽었을 텐데.
“목사님께서 책을 많이 갖다 주셨다. 주로 주말에 읽었다. 그러나 많이 읽지는 못했다. 사건 때문인지 책 내용이 잘 안 들어왔다. 그래서 두 세 번 읽은 적이 많다. 성경도 많이 읽었다.”
-11개에 걸친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 모두 무죄로 판결났다.
“변호사들도 이런 대형 사건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모두 무죄가 됐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일을 돌아보면 모두 기적이다. 동생이 국정원에서 풀려난 것, 1심에서 무죄가 나오고 중국에서 북한 출입경기록이 모두 위조됐다는 회신을 보내 온 것, 변호사들이 가족처럼 뭉쳐서 도와주신 것, 목사님과 신부님들이 믿음으로 함께해주셨다는 것 등이 모두 놀라울 뿐이다.”
-만약 돕는 손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아마 어두운 역사 속에 묻혀 하염없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진행하면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피해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인혁당 사건 당사자 분들과 재일동포 등이었다. 재일동포 어르신들은 고국에 유학 왔다가 하루아침에 간첩단으로 몰려 40년 만에 무죄를 받았다. 그분들은 나를 만나더니 손을 잡고 많이 우셨다. 당시엔 간첩 인정을 하지 않으면 폭력이 수반됐다. 후유증으로 장애를 가진 분도 있었다. 그분들을 보면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대한민국에서는 더 이상 조작된 간첩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나는 그냥 9급 공무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지금 나에게 가족은 소중하다. 내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감싸주고 안아줬다. 무엇보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아내가 있다. 장인 장모 역시 굳건한 신앙인들이다. 나를 아들처럼 여겨주셨다. 그분들은 한 번도 사건에 대해 묻지 않으셨다. 그저 고생했다고만 하셨다. 나는 이분들을 사랑한다.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받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은혜를 갚고 싶다. 사회복지를 공부했으니 배운 지식으로 어려운 분들을 돕고 싶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얼굴-간첩혐의 대법원서 무죄 ‘유우성’] 감방서 유일한 대화는 기도…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셨다
입력 2015-11-20 2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