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채수일]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

입력 2015-11-19 19:11

신경학자이자 의사이면서 의료서사작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올리버 색스(Oliver Sacks)가 지난 8월 30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깨달음’, ‘뮤지코필리아: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등의 번역서로 한국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그는 영국의 정통파 유대교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18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그의 성적인 감정을 힐문하면서 그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시인하게 만들고, 놀란 어머니는 ‘이 혐오스러운 것, 넌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해’라고 꾸짖었을 때 그는 유대교의 편협함과 잔인함을 싫어하게 되었고, 종교와의 결정적인 균열도 시작되었습니다.

1960년 의사가 된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약물중독으로 죽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심각한 중독에 시달렸습니다. 자신도 환자이면서 뉴욕의 브롱크스에 있는 만성질환자 병원에서 환자들과 만나면서 그는 자신의 천직을 찾아냈는데, 정신분열증이나 신경적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이른바 의료서사작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2005년 한쪽 눈에 안구흑색종이라는 희귀한 종양이 생겼고, 종양을 제거하기 위한 방사선 치료로 한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14년 전이된 암이 간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고, 몇 달 살지 못할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가까이 온 죽음은 그에게 자신의 삶을 마치 풍경을 보듯 높은 고도에서 조망할 수 있게 했습니다. 불현듯 시야가 걷히고 초점이 명확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 병원에서 쓴 세 편의 에세이를 뉴욕타임스에 게재했는데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의 마지막 에세이, 지난 8월 14일자로 실린 그의 마지막 글, ‘안식일’입니다. 유대교로부터 결정적인 결별을 선택한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그가 삶의 마지막에 다시 유대교의 근본정신인 ‘안식일’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올리버 색스는 자신이 죽기 전 쓴 글에서 자신의 모든 삶에서 숨기는 것 없이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약해졌고, 숨이 가쁘고, 한때는 강건했던 근육이 암으로 녹아 없어진 지금, 나는 초자연적이거나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치 있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 내 안에서 평화를 얻고 있는 셈이다. 생각이 계속 안식일을 향한다. 휴식의 날, 일주일의 일곱 번째 날, 그리고 인생의 일곱 번째 날이기도 한 안식일, 할 일을 끝내고 좋은 마음으로 쉴 수 있는 바로 그날.”

안식일은 서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6일간의 사역인 하나님의 창조의 마지막 날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하여 삶의 의미는 노동과 활동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되고, 쉼은 무의미한 것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아니 일은 삶이고, 쉼은 죽음과 동일시된 것이지요. 압축적 근대화를 이룬 한국사회에서는 일 자체를 삶의 의미와 목적과 동일시하는 시각이 더욱 확고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을 의미하는 헬라어 ‘텔로스’는 목적, 성취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마지막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일은 쉼에서 완성되고,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삶의 성취인 것입니다.

하지만 높은 실업률과 청년들이 꿈을 포기하는 시대, 고령화시대에 안식일을 말하는 것은 뚱딴지같은 소리라고 빈축을 살 일입니다. 그러나 삶의 모순은 삶 안에서가 아니라 삶 밖(끝)에 있는 높은 곳(안식일)에서 조망할 때 더 명확해진다는 것이 올리버 색스가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채수일(한신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