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슈뢰딩거의 고양이

입력 2015-11-19 19:07

지난 4월 나는 네팔의 카트만두에 있었다. 마침 귀국하는 날이라 떠날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주위 공간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었다. 진동이 멈추고 나서 서둘러 방 밖으로 나오다가 잠깐 문 앞에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우스운 생각이지만, 이미 죽은 나의 몸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내가 유령이 된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숙소 밖으로 나오자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넋이 나가서, 겁에 질려서, 혹은 울부짖으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요즘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책들을 뒤적이다가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을 설명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해 읽었다. 밀폐된 상자에 고양이를 넣는다. 안에는 우라늄 입자가 있는데 붕괴되어 알파 입자를 방출할 확률이 1시간에 50%이다. 상자는 알파 입자가 방출되면 고양이가 죽도록 설계되어 있다. 1시간 뒤에 고양이는 살아 있을까, 죽었을까. 물리학자들은 상자를 열어서 관찰자가 고양이를 볼 때까지, 고양이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상자를 열어서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자를 열고 관찰자와 대면하는 순간 고양이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의미다. 관찰자의 시선이 고양이가 살거나 죽는 조건 가운데 하나라는 것. 현실에서는 상식에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란다.

비약이겠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나에게 지진을 경험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거리에 나가 눈앞에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자 비로소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나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거리로 뛰쳐나갔을 때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면 나는 정말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었을까? 이성복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지 않았을까? 그저 존재할 가능성에 불과한 나를 정말로 존재하게 만드는 조건은 무엇일까?

부희령(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