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400장 ‘카드’로 쓴 근현대 400년 세계교양

입력 2015-11-19 19:00
한 장의 카드뉴스처럼 작성된 본문 페이지들. 천년의상상 제공
디지털과 모바일이라는 압력 하에서 미디어 실험이 활발하다.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에 집중됐던 고민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로 이동하는 중이다. 다양한 시도들이 전개되고 있지만 ‘less text, more image(글자는 줄이고, 이미지는 늘리고)’로 그 방향을 개괄한다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카드뉴스’는 원고지 네댓 장 분량의 뉴스마저도 너무 길다고 느끼는 이 시대 독자들에게 이미지와 카피로 구성된, 서너 장의 카드로 뉴스를 전달한다.

뉴스도 길다는 세상에서 책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책의 시각화라는 게 가능할 것인가? 천년의상상 출판사가 선보인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만한 ‘책의 실험’이 될 수 있다. 400년에 이르는 근현대 세계사가 이뤄낸 지식을 400페이지 분량으로 담아낸 책인데, 각 페이지는 한 장의 카드처럼 작성됐다. 페이지의 절반 이상은 이미지가 차지하며, 텍스트는 본문 활자보다 훨씬 큰 크기로 길어도 10행을 넘지 않도록 배치됐다. 그러니까 400장의 카드로 근현대 세계사 400년을 서술하겠다는 기획인 것이다.

책은 근대를 연 ‘과학혁명’을 시작으로 ‘사상혁명’ ‘정치혁명’ ‘경제혁명’을 다루며, ‘개인의 탄생’과 ‘근대 도시의 탄생’, 그리고 ‘동아시아의 근대 대응’과 ‘한국의 근대 경험’까지 아우른 뒤 ‘근대 비판’으로 완료된다. 한국의 독자로서 알아야 할 주제들을 빠짐없이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텍스트는 극도로 간소하다. 1장 ‘과학혁명’은 56페이지인데, 1장의 텍스트만 추출해 일반 책의 본문 활자로 재배치할 경우 7∼8페이지 분량이나 될까 싶다.

선완규 천년의상상 대표는 “가장 올드한 미디어인 책, 그 중에서도 가장 텍스트 중심인 인문서를 가지고 뉴미디어 시대의 독자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형식을 실험해 보았다”면서 “책과 스마트폰 사이에 존재하면서, 책으로 사람들을 끌고 들어가는 인트로 같은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또 “텍스트를 압축하고 핵심만 모아놓았지만 그것들을 그냥 나열한 것은 아니다”라며 “각 장마다 스토리라인을 배치해 흥미롭게 읽어가면서도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이 책의 텍스트는 대학 인문교육의 모범이라고 평가 받는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펴낸 읽기 교재 ‘우리가 사는 세계’를 원본으로 삼았다. 경희대 1학년들은 예외 없이 1학기에 ‘인간의 가치 탐색’을, 2학기에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배운다. 각각 ‘인가탐’ ‘우사세’로 불리는 이 교양필수과목은 동서양의 고전들을 두루 읽어내는 수업으로 학생들 사이에 악명이 높다. 두 교재는 후마니타스 칼리지에 소속된 수십 명의 젊은 인문학자들이 공동저술한 것으로 현재 3판까지 개정됐다.

이영준 후마니타스 교양교육연구소 소장은 “‘인가탐’과 ‘우사세’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세계의 인문과 교양을 정리한데다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수정을 거듭한 인문학 교재라는 점에서 출판 요청을 많이 받았지만 원칙상 출판하지 않았다”며 “이번에 나온 책은 그 교재의 핵심적 내용을 요약하고 시각적으로 변주한 것으로서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