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속도가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보다 먼저 보고 먼저 타격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눈치 채지도 못했던 적이 순식간에 미사일이나 포탄을 쏘아대면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지요. 여러 나라가 속도가 빠른 무기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뭐든 ‘빨리빨리’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군에서 요즘 ‘슬로(천천히) 슬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바로 ‘책읽기 운동’입니다. 근무와 격한 훈련을 이어가야 하는 숨 가쁜 일정에도 시간을 뚝 잘라내 책읽기에 몰입하는 장병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책 읽고 북토크해요=충남 계룡대 공군본부 내 실내 스튜디오에서는 지난 2월부터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북 토크 프로그램인 ‘책 읽는 공군’입니다. ‘병사에 의한, 병사를 위한, 병사의 동영상’을 모토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모두 병사들입니다.
PD이자 MC인 임건(23) 상병 주도로 촬영은 강범준(23) 일병이 맡습니다. 패널로 첫 방송 참여의 영예를 얻은 병사는 공군정보체계관리단 김만수(24) 병장, 이성화(23) 상병, 기상단 김승욱(23) 상병입니다.
이들은 우선 첫 번째 소개될 책을 선정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각 군과 국방부가 공동으로 선정해 각 부대에 배치하는 ‘진중문고’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습니다. 치열한 토론 끝에 첫 번째 책은 ‘눈치 보는 나, 착각하는 너’(박진영 지음·시공사 펴냄)로 선정됐습니다. 책을 소개하는 장면에는 ‘헤헷, 내가 첫 번째 책이야’라는 자막도 넣었습니다. 병사들이 ‘뭔데’ 하고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월 27일 공군본부 홈페이지 ‘공군공감’ 블로그에 올려진 20분짜리 방송은 첫 회부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책에 대한 병사들의 진지한 갑론을박과 엉뚱한 해석이 생각거리와 웃음을 던져줬다고 합니다. 11월 현재 총 20회가 제작된 이 프로그램은 100만뷰를 넘어섰습니다. 지난 13일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독서경영우수직장인증’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을 제안한 공군본부 정훈과 정훈정책담당 라동섭 중령은 “책을 통해 군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공군은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과 ‘내게 맞는 책읽기’ ‘독서 코칭’ ‘독서 퀴즈’ ‘독서왕 선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군 복무기간 50권 읽자’=강한 훈련과 철저한 정신무장으로 정평이 난 해병대에서도 독서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해병대 Reading 1250운동’이 해병대원들의 독서열을 지폈습니다. 군 복무기간에 책 50권을 읽자는 운동입니다. 흙먼지 뒤집어쓰고 거친 훈련을 받아 온몸이 땀으로 푹 절기 일쑤인 해병대원이지만 누적된 피로를 책읽기로 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운동은 강화도 경계근무를 수행하고 있는 해병 2사단 52대대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부대는 힘든 훈련에 지친 병사들에게 책읽기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독서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위해 지휘관들이 쉬는 시간이면 책을 펼쳐들었다고 합니다. 체력만으로 전쟁을 치르는 게 아니라는 것, 깊은 인문학적 지식과 소양이 기반이 돼야 훌륭한 전사(戰士)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없이 보여준 셈이죠.
한두 사람이 책을 읽기 시작하자 경쟁이 일었고, 아예 목표를 세워 추진하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합니다. 현재 이 부대 장병 80% 이상이 20권 이상 책을 읽었고 144명이 50권 이상, 8명이 100권 이상 읽었답니다. 부모들의 호응도 컸습니다. 군에 간 아들이 집에선 책을 전혀 읽지 않더니 이젠 “책을 사서 보내달라”고 하고, 방에 처박아놨던 책을 보내달라고 하자 부모들은 “우리 아들이 변했다”고 너도나도 책을 기증하겠다고 나섰다는 겁니다. 그러자 해병대 본부는 책읽기를 모든 산하부대에 적용키로 했습니다. 지난해 해병대본부가 조사해보니 부대원들이 1달에 2권 이상 책을 읽은 부대가 74%에 달했다고 합니다. 해병대는 올해는 90%가 넘을 수도 있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함정과 섬, 전방부대 GOP도 책과 함께=해군은 함대사령부뿐 아니라 함정에도 도서관을 마련해 장병들이 늘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 번 출동하면 짧게는 2주간, 길게는 한 달 이상 해상훈련을 실시하는 함정에는 많은 책을 대출해주고, 섬에 있는 장병들을 위해 20권을 한 세트씩 8세트로 분류해 순환대여하고 있습니다. 저자와의 대화시간을 갖는 ‘통통 인문학’ 행사도 매월 1차례 갖고 있습니다.
1함대 군수전대는 ‘수병이 들려주는 독서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반기에 한 번씩 갖고 있습니다. 우수 독후감 발표회인데요, 책을 읽고 느낀 진솔한 감상평으로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입대 전과는 사뭇 달라진 장병도 꽤 있는 모양입니다. 진해기지사령부 지은배(23) 상병은 “자연스럽게 독서 분위기가 조성돼 꾸준히 책을 읽었는데 휴가 때 친구들이 몰라보게 똑똑해졌다고 놀라더라”고 했습니다.
전방부대 등 오지 근무가 많은 육군에서도 일반전초(GOP)와 해안·강안 소초에 독서카페를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전방에 새로운 시설이 들어서기 힘들어 고안해 낸 게 바로 ‘컨테이너 독서카페’입니다. 2016년까지 약 17억8000만원을 투입해 전 GOP와 해안·강안 전 소초에 독서카페를 만들 예정이라고 합니다. 컨테이너 독서카페는 약 1000권의 책을 꽂을 수 있는 5단 책꽂이와 탁자·의자, 벽걸이형 냉난방기도 갖췄고, 향기 그윽한 차도 마련돼 있습니다.
책 읽는 병영 만들기에 도움을 주겠다며 컨테이너 독서카페를 기증하려는 이들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12사단 GOP에 들어선 1호 컨테이너 독서카페는 애서가이자 다독가인 한 안과의사가 기증했습니다. 벌써 17호점이 개관됐고 33호점까지 기증자가 예약돼 있다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빠져 책을 멀리해온 젊은이들이 군에 들어가 ‘책 읽는 재미’를 재발견하고 천천히 자신의 삶을 재조명해보는 모습이 더 든든해 보인다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
[슬로뉴스] ‘讀’에 빠진 軍
입력 2015-11-26 18:48 수정 2015-11-26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