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트복지회에서 장애인을 대하며 몸으로 느끼고 체험한 것들이 내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문적으로 배우고 익힌 부분보다 훨씬 유익했다. 단지 몸이 불편하고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가정에서 버림받고, 사회에서 냉대받고 무시당하는 장애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1981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였다. 고위공직자 출신인 김한규씨가 홀트복지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낙후시설 개보수 명령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심신장애자복지법(현 장애인복지법)이 시행되는 첫해로 홀트일산원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었다.
시설 신축을 위해 기독교계에도 도움을 여러 곳에 요청했는데 순복음중앙교회(현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께서 거금을 헌금해 주셔서 직업재활관과 교회, 2개 동을 지을 수 있었다. 말리 여사와 직원 모두가 감사해 했는데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이 매주일 먼 이곳까지 와서 꾸준히 자원봉사도 해주었다.
하루는 숙소에서 잠을 청하려는데 원장이 전화를 걸어 “당장 O군을 이곳에서 내쫒으라”고 엄청나게 화를 냈다. 알고 보니 지체장애인 O군이 일터에서 일하다 지적장애인 M양의 가슴을 만지다 현장에서 들킨 것이다.
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어 다음날 짐을 다 싸게 하고 내보내려는데 다른 장애시설로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또 O군은 손재주도 좋아 혼자 자립할 수 있도록 내가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일단 구의동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장애인도 우리 집에 오게 됐고 난 집 근처 숙소 한 곳을 임차해 아예 ‘로고(LOGO)하우스’라 이름 짓고 장애인재활공동체를 만들었다. 운영비는 내 봉급을 고스란히 넣었다. 난 이들이 언제까지 사회의 도움만 받아선 안 되며 스스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10여명까지 늘어난 로고하우스는 연필통 등 목제제품을 만들어 팔아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일산에서 퇴근한 뒤 로고하우스에 가서 아이들과 늦은 저녁을 먹곤 했다. 또 집 근처 목욕탕은 문을 닫는 밤 11시 전 1시간은 공짜로 입장을 시켜줘 늘 함께 목욕을 했다.
이때 수많은 장애아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많은 대화를 했기에 그들이 느끼는 감성과 아픔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이후 내가 대학교수로, 장애인재활전문가로 사역하는 데 탄탄한 기초가 되어 주었다.
홀트에서 말리 여사의 신임을 받던 나는 가끔 해외 장애사설을 둘러볼 기회도 있었다. 선진국의 장애인 복지는 상상 이상이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이 수준에 오를 수 있을까 부럽기만 했다.
말리 여사는 198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얼바인에 가서 특수휠체어면허증을 따 오셨다. 그리고 이듬해 나도 가서 면허를 받아오라고 하셨다. 온 몸이 뒤틀리는 뇌성마비 장애는 자세를 잘 잡아주는 특수휠체어가 필요하고 이를 잘 작동시키고 조립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교육을 3박4일간 받은 뒤 시험을 치르고 면허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기술적인 부분뿐 아니라 뇌성마비 장애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도 병행했다.
LA로 간 나는 대학에서 특수교육 전공을 했기에 지식도 있는 데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일과 후에 조립법을 복습하곤 해 최종 시험에서 93점을 받았다. 1년 전 말리 여사가 받은 점수는 76점이셨다.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그저 열심히 한 것밖에 없는데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이 93점 특수휠체어면허증 성적표는 내 인생을 또 한번 놀랍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정리=김무정 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종인 <5> 장애인 자립 위한 생활공동체 ‘로고하우스’ 열어
입력 2015-11-19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