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큰맘 먹은 여행’ 가자니 테러 불안… 취소하자니 위약금 걱정

입력 2015-11-18 04:03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두 눈 딱 감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취업준비생 박모(25·여)씨는 지난 12일 한 여행사의 유럽여행 패키지를 예약했다. 다음 달 21일 파리로 출발해 5일간 체류한 뒤 독일·체코 등을 거쳐 로마에서 귀국하는 코스였다.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는 희망에 부푼 것은 잠시였다. 예약 이튿날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서 연쇄 테러가 발생해 132명이 사망했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박씨는 16일 여행사에 취소 수수료를 문의했다.

여행사는 “계약금 40만원과 항공 취소 위약금 20만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가보지도 않은 여행인데 60만원이나 되는 위약금을 물자니 너무 아깝다. 그렇다고 여행을 떠나자니 불안하다. 박씨는 “하루에도 열 번씩 마음이 바뀐다. 걱정은 되는데 미련이 남아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여행 출국일이 다가오는 여행객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어렵게 준비한 여행인데 막상 떠나려니 불안감이 크고, 취소하려니 돈과 시간이 아까워서다.

여기에다 여행업체마다 위약금 면제 기준이 제각각이라 더 속을 쓰리게 한다. 테러로 여행을 취소했을 때 위약금을 면제해주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이 때문에 각 여행업체는 규정을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 출국일이 가까워질수록 취소 위약금은 늘어난다.

여행객의 취소 문의가 잇따르자 일부 대형 여행사는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여행객을 상대로 취소 위약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나섰다. 하나투어는 23일, 모두투어는 20일에 출발하는 여행객까지가 면제 대상이라고 17일 밝혔다. 이후에 출발하는 여행객의 경우 다시 논의해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도 테러가 발생한 13일 이전에 예약한 고객에게 내년 1월 15일까지 날짜 변경 수수료와 유럽 내 구간 변경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위약금 면제는 어디까지나 대형 업체 이야기다. 테러나 여행경보에 따른 위약금 면제 규정은 없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국외여행 표준약관에는 ‘천재지변, 전란, 정부의 명령, 운송·숙박기관 등의 파업·휴업 등으로 여행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지만 ‘테러’는 여기에서 빠져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표준약관에는 테러 관련 규정이 사실상 없다”면서 “여행사가 테러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포괄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공정위가 이를 강제할 순 없다”고 말했다. 업체가 위약금을 물리면 어쩔 수 없이 내야 하는 것이다.

여행업체들은 파리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며 여행상품의 일정을 강행하는 분위기다. 일부에선 손실 때문에 무리하게 여행을 추진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여행업체 관계자는 “항공이나 숙박, 기차권의 경우 취소 수수료를 요구한다. 여행객에게 위약금을 면제하면 그 손해를 여행사가 전부 떠안을 수밖에 없다”며 “여행객을 대신해 여행업체가 수수료 전부를 낼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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