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대학원에서 보건학 공부를 끝낼 무렵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직원을 공모했다. 면접을 거쳐 합격이 된 나는 드디어 전공한 특수교육학과 보건학을 현장에서 적용해볼 수 있게 되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전쟁과 가난으로 부모를 잃은 아동을 입양시켜주기 위해 해리 홀트씨가 설립했다. 그는 한국 고아 8명을 입양한 것을 시작으로 부인 버다 여사와 함께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고아와 장애인들을 돌봤다. 홀트씨는 아이들이 지낼 곳을 마련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지역을 개간해 밭을 일궜으며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아이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이처럼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준 홀트씨의 정신을 이어받아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사업은 물론 아동, 청소년, 미혼모, 장애인, 저소득계층 등에게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복지 전문기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입사한 1981년에는 홀트씨는 돌아가시고 40대의 딸인 말리 홀트 여사가 자원봉사를 하며 한창 시설을 키워가고 있었다. 난 집이 서울 구의동이었음에도 일산에서 근무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산에서 구의동까지 가려면 기차를 타고 신촌까지 나와 다시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그래서 아예 일산 시설에서 지내다 주말이 되면 집에 가곤 했다.
이때는 일산복지원의 모든 시설이 아주 열악했다. 말리 홀트 여사가 장애인을 돌보는 정성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 내가 보기에 혼자 열 사람 몫의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성격이 불같은 데가 있었지만 장애인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을 베풀어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장애인과 고아 등 300여명이 함께 생활했는데 그중 80여명은 죽도 떠 먹여주어야 하는 중증이었다.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버려지고 버림받은 장애 아이들이 모두 이곳에서 보살펴지고 있었다.
난 이곳에서 지적장애 원생들을 한명 한명 면담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같은 지적장애인 C씨(30)와 K양(24)이 결혼하게 해달라고 나를 계속 졸랐다. 지적장애인끼리의 결혼이 조심스러워 계속 회피하다 “너희들이 100만원을 모으면 결혼시켜주겠다”고 했다.
당시 C씨는 IQ가 60정도로 시설에서 일을 해 월 1만원 정도의 훈련비를, K양은 죽 끓이는 곳에 근무하며 월 2500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내 봉급도 10만원 남짓일 때였다.
난 이들이 100만원을 모으기 힘들 것이라 여기고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1년 후 통장에 100만원을 만들어 내 앞에 턱 가져왔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들이 100만원을 만들기 위해 휴지와 깡통을 줍고 보육교사들의 심부름을 해주며 눈물겹게 돈을 모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결혼이 하고 싶으면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았을까. 이들이 결혼이 가능한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도와주자.”
난 결혼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이 결혼했을 때 다시 지적장애 아이가 나올 확률이 없는지 염색체 검사도 해보고 일산 농장 내에 살집도 마련한 뒤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양복도 맞춰주고 드레스도 협찬받고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잘 올렸다. 당시 매스컴에서도 이례적인 결혼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이 부부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도움을 받으며 정상인 아들도 낳았고 홀트에서 계속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이 부부의 성공적인 결혼 사례는 정신지체, 뇌성마비 등 장애인들도 정상인과 같이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음을 내게 깨닫게 해주었고 이후 난 많은 커플을 탄생시키는 데 앞장섰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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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1-18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