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사색의 계절이라는데 모처럼 마음먹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면 온갖 잡념이 떠올라 머리가 복잡해진다. 우아하게 사색에 잠기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 늘어나는 불면증 환자들의 공통적 증상은 누워서 자려고 하면 온갖 생각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에게는 이런 현상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소가 급할 때는 먹이를 급히 먹고 나중에 한가하면 반추위를 활용해 다시 여물을 끌어올려 우물우물 씹어서 천천히 소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낮에는 바빠서 사건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급한 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가 자려고 누우면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소화시켜 달라고 떠오르는 것이다. 몸이 피곤해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겨우 잠이 들면 이번에는 잡생각들이 꿈속에 나타나 소화시켜 달라고 한다. 겨우 잠들었는데 밤새 꿈속에서 헤매다 깼다는 하소연을 많이 듣는 것이 바로 그런 연유다. 이러다보니 아침이 되어도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하루 종일 힘들어한다.
쉰다는 것은 그동안 쌓인 피로를 푸는 것인데 육체적인 피로와 더불어 정신적인 피로도 풀어야 한다. 정신적인 피로를 푸는 방법은 그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떠올려 정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들은 대부분 좋지 않았던 경험이라 정작 떠올리려면 마음이 불편하다. 즉 생각하기 싫었던 내용들을 나도 모르게 무의식의 세계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이 내 마음속에 없는 줄 착각하며 지낸다.
그런데 이렇게 무의식에 억압해 놓은 것은 불안정하게 눌려져 있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늘 들썩거린다. 그러면 우리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뭔지 불편하거나 불안한 느낌만 인식하게 된다. 이때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지 직면해야 한다.
혼자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정신치료자를 만나거나 성직자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속에 맺혀 있는 것을 다 풀어놓아야 한다. 마음속 깊이 쌓여 있던 것을 이렇게 청소하는 것이 마음의 정화다. 풀어놓고 청소해야 할 내용들은 대개 부정적인 것이라 이런 것들이 정화되면 시원해지고 가뿐해진다. 마음의 짐을 덜어놓는 느낌도 든다. 마치 치과에서 스케일링을 하여 입안 전체를 깨끗이 하는 것과 비슷한데 마음의 스케일링을 했을 때는 내 마음 전부가 깨끗해지니 이보다 더 후련하고 기쁠 수가 없다. 이것을 경험해본 사람은 의미를 안다.
어느 목사님이 밤새 기도하고 새벽에 나와 나뭇가지에 걸린 달을 보니 그 달과 나뭇가지가 어제 보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그게 뭔지 금방 알아차린다. 아니 그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깨달음의 경지도 이와 비슷하다. 깨닫기 전과 후의 세계는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것과 같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깊어가는 가을, 나 자신에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자. 정신치료자의 도움을 받든 성직자의 도움을 받든 아니면 혼자서든,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들여다보고 인정하는 용기를 내어 마음의 청소를 하자. 부정적인 생각은 나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다 갖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청소를 통해 정화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마음의 정화는 성숙한 사람으로서는 꼭 해야 할 일이고 결과는 늘 좋다. 마음청소의 첫 걸음은 내 마음 속의 미움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고백을 하면 짐이 덜어진다. 내가 나에게 고백하는데 부끄러울 게 뭐 있나. 지금 당장 해보자.
박용천(한양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
[청사초롱-박용천] 마음의 淨化
입력 2015-11-17 2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