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인 <3> 대학신문 기자로 장애인 차별·편견 이슈화 활동

입력 2015-11-17 19:44
한국사회복지대학 학보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할 때의 김종인 교수. 장애인 문제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던 부분들을 이슈화했다.

시각장애 학생과의 만남을 통해 마음을 잡고 하나님의 강한 인도를 깨닫게 된 나는 곧장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한 시각장애 고교생의 녹음도서나 점자도서를 만들어 주는 일을 도맡았다. 당시 원화여고 수선화클럽에서 녹음봉사를 해주었는데 녹음으로 안 되는 것이 수학책이었다. 그것은 내가 점필을 배워 점자로 찍었다. 수학참고서 1권을 점자로 찍으면 무려 13권이나 됐다. 그래프가 있는 수학 방정식 문제는 시각장애인이 풀기에는 고난 그 자체였다.

당시는 장애인 특별전형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예비고사를 통과하는 것이 시각장애인에겐 사법시험 합격 이상으로 어려웠다. 1970년대는 장애인 차별과 편견, 무시하는 의식이 만연했다. 장애인을 위한 법이나 제도도 전무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질수록 장애인들이 엄청난 사각지대에서 고통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부분을 개선하는 데 조금이라도 역할을 해보려고 대학신문 견습기자로 들어갔다. 2학년 2학기에 편집국장 서리가 됐는데 당시 모자보건법에서 지적장애인이 임신하면 양수검사를 해서 낙태 시술을 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탄생하는 아이를 부모가 지적장애라는 이유로 낙태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법 개정에 반대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1인 시위도 했고 학보에 대서특필해 이를 문제 삼았다. 나의 이런 열정과 움직임이 알려졌는지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직접 막아 법 개정이 무산되었다.

이때 대학신문사 편집장에 불과한 내가 청와대로 초청돼 격려를 받고 박 대통령으로부터 ‘심신재활(心身再活)’이라는 휘호도 선물 받았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이 휘호는 내 삶에서 재활에 더 열심을 내는 견인차가 되어 주었다.

학보사에서 만난 안병즙 지도교수님이 내 삶의 멘토가 되어주신 것은 축복이었다. 장로이시면서 장애인들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관심을 갖고 내게 장애인교육과 재활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갖도록 도와주셨다.

교수님은 지체장애인 대학생 모임인 ‘푸른샘’의 지도교수도 하셨는데 장애인들의 결혼식 단골 주례자셨다. 한 번은 한 장애인이 수술해야 하는데 피가 부족하다고 하자 그 자리서 헌혈하시겠다고 팔을 내미시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교수님은 늘 약자 편에서 정의롭게 사는 길을 성경말씀을 통해 제시해 주시곤 했다. 졸업할 때쯤 ‘자폐증’이란 장애가 새롭게 인식되고 이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장애를 가진 이가 많은데 이를 이해하려면 의학적인 식견이 필요해 보건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연세대대학원 보건학과에 응시해 당당하게 합격했다. 대학교복에 연세원(연세대대학원)이라고 쓰인 배지를 달자 갑자기 엄청난 자긍심이 솟아나왔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 밑바닥에 있던 학력 콤플렉스를 풀어주신 것이다.

대학원에 다니며 영등포여자상업고등학교 산업체특별학급 교사로 일했다. 당시 구로공단에는 128개 기업 공장이 있고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공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일하고 있었다.

‘낮에는 산업역군, 밤에는 면학학도’란 슬로건을 내걸고 공부하는 여공들에게 ‘윤리’와 ‘생물’ 과목 등을 가르쳤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공도 수두룩했지만 보람이 컸다. 학생들과 이야기해 보면 대부분이 집에 소 1마리 사주겠다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때 동생(김종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과 원효로에서 자취를 했다. 난 밤늦게 집에 들어가서도 장애인 관련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게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고 또 그들의 아픔을 나누라는 분명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