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부족 환자에게 ‘닭 살 돈 내주라’고 처방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입력 2015-11-17 22:05
①평양 무의촌에서 진료 중인 장기려 박사(왼쪽) ②월남 전 가족사진으로 뒷줄 오른쪽이 장 박사. 아기 안은 여성이 부인이다. ③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운영하던 무료시술지정병원 앞의 장 박사 ④장 박사가 월남 후 시작했던 부산의 진료소. 복음병원의 시초(현 고신대병원)가 됐다. ⑤장기려 역으로 열연한 배우 정선일. CTS기독교TV 제공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내주시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1911∼1995) 박사가 영양실조 환자에게 직접 썼던 처방전이다.

그는 평생 예수를 닮은 사랑으로 환자를 돌본 의사이자,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만든 사회사업가였다.

또 숨질 때까지 북에 둔 아내와 자녀 오남매를 그리워했던 이산자였다.

CTS기독교TV는 21일 오후 3시과 23일 오후 11시 장 박사의 생애를 조명한 창사 20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은 사랑의 기적, 장기려’를 방송한다. 세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깊이 있게 재현한다. 정재구 PD는 17일 “예수님의 삶을 닮고자 했던 장 박사의 생애를 그렸다”며 “이 시대에 ‘장기려 정신’이 있다면 세상이 더 따뜻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방송통신위원회 제작지원을 받은 이 다큐멘터리는 국내뿐만 아니라 페루 몽고 베트남 3개국에서 촬영됐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장 박사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후손, 제자, 환자, 학자 등 다양한 이들의 증언을 생생하게 담았다. 연기파 배우 정선일 최선자 박종설 등이 장 박사의 생애를 드라마로 재현한다. 탤런트 정애리가 스토리텔러로 참여한다. 85분 분량.

장 박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할 때 서원했다. ‘하나님,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진료하는 의사로 살겠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조모와 부모의 영향이 컸다.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기도했다. 장 박사의 어린 시절 이름은 ‘금강석’이었다. “우리 금강석이 자라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이는 인물이 되게 해 주옵소서.”

그는 6·25전쟁 중 차남 가용(1935∼2008)만 데리고 월남했다. 1951년 7월 부산 고신대병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우고 26년 동안 원장으로 일했다. 복음병원은 제삼영도교회 창고에서 시작됐다. 장 박사는 영양이 부족한 환자에게 음식 값을 내주라고 처방전을 쓰고, 가난한 환자에게 내복을 사주고 수술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57년 복음병원을 신축했을 때다. 한 직원이 장 박사에게 왜 안색이 어두운지 물었다. 그는 “이 큰 병원을 운영하려면 가난한 사람들한테도 돈을 받아야할 텐데 이게 좋을 일인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부산 사람들은 당시 ‘복음병원에 간다’고 말하지 않고 ‘장 박사한테 간다’고 했다. 그에게 진료를 받으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위안 받았기 때문”이라고 정애리는 얘기한다.

장 박사는 59년 국내 최초로 간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 한국이 간이식 대국으로 발돋음하는 데 기여했다. 대한간학회는 그의 업적을 기념해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지정했다. 68년 한국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다. 부산 시내 100여개 교회를 중심으로 조합원을 모집했다. 담배 한 값이 100원이던 시절, 1인당 조합비는 60원에 불과했다.

장 박사가 만든 조합은 89년 정부가 만든 의료보험제도의 모델이 됐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는 “그는 스스로 좋은 제도를 만들어 약자를 도우려 했다. 기독교적 가치의 사회화”라고 평가한다. 장 박사는 79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무슨 일이든 그 동기가 좋고, 방법이 정당하면 실천하려 노력했을 뿐”이라고 했다.

장 박사는 부산기독의사회를 만들어 간질환자와 뇌성마비 장애인을 진료했다. “장 박사님이 노래를 잘 하셨어요. ‘예수는 나의 힘이요’라는 찬송을 불러주시고 ‘예수님이 병든 자를 돌보시고 병도 낫게 하셨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라고 환자 가족이 증언한다. 무의촌 진료도 했다. 거제도에 병원이 없던 60년대 말 주말마다 140㎞ 뱃길로 진료를 다녔다.

장 박사는 병원에서 마련해준 복음병원 꼭대기 옥탑방에서 청빈하게 살다 생애를 마쳤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 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건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이라고 북에 있는 아내에게 그리움 가득한 편지를 남겼다. 그는 이산의 아픔을 기도로 달랬다.

“기도 중 부인이 당신 옆에 와서 눕더래요. 참 오랜만이라며 부인을 안았는데 눈을 떠보니 꿈이더래요. 그 얘길 하시는 데 얼마나 우셨는지 눈이 퉁퉁 부으셨더라고요.” “제가 잠을 깨웠는데 박사님이 ‘조금만 천천히 깨우지 그랬냐’며 서글픈 표정을 지으셨어요. ‘딸이 막 기어오면서 아빠 하고 안기려는데 자네가 깨워서 안지 못했다’고.” 가까이서 그를 돌본 이들의 얘기이다.

장 박사는 아내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사양했다. ‘나는 사진이라도 한 장 갖고 있으니까’라며. 아내 김봉숙 여사는 남편처럼 평생 독신으로 살다 2004년 북에서 숨졌다. 후손들은 장 박사의 뒤를 이어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차남 가용씨는 서울대 의대 교수를 역임했고, 손자 여구(51)씨는 서울백병원 의사로 일한다. 증손자 지인(20)씨도 중앙대 의대에 재학 중이다. “성공적 삶이란 하나님의 사명을 지각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나는 가난한 환자를 위해 의사가 되기로 했다.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내 삶은 성공이고, 이 결심을 잊고 살면 내 삶은 실패라고 생각했다.” 고신대복음병원이 장 박사를 기려 페루에 지은 장기려기념의료선교센터, 제자들이 베트남 몽골 등에서 의료 봉사하는 모습을 방송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숨진 지 올해로 20년. 그의 사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