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재호]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기사삭제권?

입력 2015-11-16 18:20

언론계가 국정 교과서 논란 속의 정국과 이슬람국가(IS)의 파리 연쇄 테러 사건에 매몰돼 있는 사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기사삭제청구권, 법률용어로는 정보통신망상의 ‘인격권에 기한 침해배제청구권’이 그것이다.

언론중재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따르면 기사삭제청구권은 정보통신망상에서 언론보도로 인하여 자신의 인격권을 침해받은 자가 피해확산 방지를 위해 그 침해의 중지 등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다. 대법원은 2013년 3월 민법 제214조(방해배제청구권)에서 기사삭제청구권을 도출해냈고 언론중재위가 이번에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명문화한 것이다. 중재위는 “아직 입법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길”이라고 자평했다.

이런 움직임은 2014년 5월 유럽연합사법재판소(ECJ)가 인정한 ‘잊혀질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 결정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중재위 측은 포괄적인 잊혀질 권리 가운데 법리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명문화한 것이 기사삭제청구권이라고 설명한다. 기사 삭제는 세 요건을 갖춰야 가능하다. 첫째, 보도 내용이 허위이고 피해자의 인격권 등 권리를 중대하게 침해하는 경우. 둘째, 보도 내용 자체에서 사생활의 핵심영역 침해가 명백한 경우. 셋째, 기타 피해자의 그 밖의 권리를 계속적으로 중대하게 침해하여 이를 방치하면 형평에 반한다고 인정되는 경우다.

하지만 유럽의 잊혀질 권리는 기사의 삭제가 쟁점이 아니었다. ECJ가 판결에서 구글의 기사노출 방식(링크)에 제한을 가한 것이지 기사 내용(원문)의 삭제를 명령한 것은 아니다. 신문사를 상대로 한 기사삭제청구는 스페인 개인정보분쟁조정기구의 심사 단계에서 일찌감치 기각됐다. 이번 개정안의 골자가 기사 삭제인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 유감인 이유다. 삭제청구권이 언론중재법상 기존의 정정·반론·추후 보도청구권이나 손해배상 청구와는 별개의 권리라는 점에서 언론사에 과도한 부담을 줄 여지가 있는 점도 걱정이다. 법이 통과되면 앞으로는 주로 삭제청구권과 손해배상을 결합한 분쟁조정 신청과 소송이 주류를 이루면서 언론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을 권력기관과 권력자들이 노린다. 그것도 법원에 갈 필요 없이 중재위를 지렛대 삼아 언론을 압박할 효과적인 수단이 생기는 셈이다. 과거엔 언론사와 다툼이 발생했을 때 거액의 손해배상과 함께 정정보도청구권이 주 무기였다. 박근혜정부 들어서도 청와대가 여럿 시도하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고 한 바 있다.

삭제와 정정은 언론자유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 언론사와 언론인에게 기사의 삭제는 자연인에게 생명권 박탈과도 같은 본질적인 문제로 이해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지적을 의식한 듯 중재위는 지난 10일 해명자료에서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삭제청구권이 남용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강조했다. 삭제 청구 대상 기사는 열람·전파될 수 있는 것에 한정하고 데이터베이스에 보존된 기사는 독자들의 열람이 차단된 것이라면 삭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삭제 이외의 방법으로는 피해자의 피해를 구제할 수 없는 때’로 삭제 요건을 더 엄격히 명문화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준사법기관이지만 행정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언론중재위가 언론자유의 본질과 직결된 삭제 판단권을 갖는 것이 온당한지도 의문이다. 중재위가 언론보도로 인한 분쟁조정권을 무기로 기사는 물론 댓글과 펌글 삭제권까지 갖는 법 개정안을 내놓은 것에 대해 곱지 않은 해석이 나오는 이유를 새겨봐야 한다.

정재호 편집국 부국장 j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