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승주] 1997년에 부모가 되셨나요?

입력 2015-11-15 18:07

전날부터 긴장은 엄마의 몫이었다.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두 시간에 한 번씩 잠을 깼다. 아이가 늦잠을 자진 않을지, 고사장은 잘 찾아갈지, 의자가 삐걱거리진 않을지, 점심으로 싸간 김밥이 차가워져 혹여 체하진 않을지, 긴장해서 아는 문제도 까마득히 생각이 나진 않을지. 아이를 어린이집에 처음 보내던 날,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던 그날처럼 온갖 걱정이 밀려왔다.

아이가 시험을 보고 있는 동안 1997년 첫아이를 낳아서 키워온 모든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만 9개월 한 몸이었던 아이가 내 몸에서 빠져나오던 느낌이 갑자기 생생해졌다. 처음 말을 하고, 걸음마를 하고, 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하던 날들. 한창 반항하던 중 2를 거쳐 벌써 수능을 치를 나이가 됐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변별력을 갖춘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수능 당일 아침 심지어 수능이 끝난 후에도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6·9월 모의고사와 난이도를 맞췄다”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말은 분명 잘못됐다. 이렇게 낼 거였으면 올해는 분명하게 변별력을 갖출 것이라고 말해줬어야 했다.

고사장을 나오는 아이는 “도대체 누가 올해도 물수능이라고 했느냐”며 분개했다. 학생들은 “정말 나만 어려웠던 거냐”며 불안해했다.

술 한 잔도 못하는 친구는 수능이 끝난 밤,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모의고사보다 턱없이 떨어진 딸의 성적에 심란해했다. 친구 딸은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다음 날 학교에 갔고, 같은 반 친구들의 눈도 부어 있었다. 학교에서 가채점을 마치자마자 친구는 딸을 데리고 논술학원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이틀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오전 오후 총 4번의 수시 논술고사를 치렀다. 수능은 끝났으되 입시는 시작이었다.

수능이 끝난 날 경찰은 유흥가를 배회하는 학생이 별로 없고, 대부분 집에서 휴식을 취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날 마음 편하게 쉰 아이들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대부분은 불안한 앞날에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정시 지원을 할 것이냐, 수시 논술고사를 보러 갈 것인가. 이 점수로 과목별 수시 등급 컷을 맞출 수 있을 것인가. 수능 바로 다음 날 열린 사설학원의 대형 입시설명회에는 어느 해보다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더 이상 평가원의 말은 못 믿겠다는 불신이 깔려 있었다.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수능을 치러보니 이제야 정말 알겠다. 입시는 전쟁이고, 고 3은 엄청 피곤하다는 것을. 한 아이당 대략 10번의 원서를 쓰고, 10가지의 경우에 대비해야 하는 현실이다. 수시 6회, 정시 3회 그리고 수시전형에 포함 안 되는 카이스트 경찰대 육·해·공사 등까지. 우리는 수시나 정시 하나로만 방향을 정하고 준비할 배짱이 없다. 그래서 다 준비해야 한다.

12월 2일 수능 점수가 발표된다. 여러 해 고 3 담임을 맡아온 교사는 ‘정시 지원은 판돈 들고 도박판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우리 아이가 지원하려는 곳은 비슷비슷한 성적표를 들고 온 이들로 북적인다. 입시는 대학 등록금 영수증 받는 순간까지 맘 놓을 수 없는 것이란다.

그래도 수능은 끝났다. 대략 40대 중후반인 우리는, 97년 무렵 아이를 낳아서 지금까지 맘 졸이며 키워왔다. 오늘만큼은 스스로에게 말해주자. “괜찮아. 수고했어. 잘 될 거야”라고. 지난해 세월호와 함께 아이를 가슴에 묻었던, 수능 얘기를 들으며 아이들이 많이 그리웠을 이들도 기억하자. 다들 같은 시대를 힘겹게 버텨내며 살고 있지 않은가. 모두들 굿 럭(Good Luck)!

한승주(산업부 부장대우)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