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의료 선교사, 애니 엘러스] 제중원 女환자 돌보며 명성황후 주치의 활동

입력 2015-11-16 18:33
애니 엘러스가 1888년 1월 15일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편지로 엘러스는 여학교 설립을 자신이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왼쪽 사진).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 받은 금팔찌로, 엘러스가 명성황후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형태이다. 이용민 박사, 연세대 박물관 제공

애니 엘러스는 1886년 7월 4일 아침, 조랑말을 타고 제물포에서 서울로 들어왔다. 날이 저물어 도성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번커(D. A. Bunker), 헐버트(H. B. Hulbert), 길모어(G. W. Gilmore) 부부가 미국에서 배를 탔을 때부터 동행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이 일행이 도착하는 정확한 시간이 미리 전달되지 않아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첫 길은 무덥고 힘들었다. 비록 자신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여 의사 학위도 뒤로 미룬 채 떠나온 아쉬운 길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필요로 했던 곳이라 부푼 기대를 한껏 지니고 있었다.

엘러스가 도착할 당시의 서울은 500년 역사의 조선을 확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중심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 밖의 간선도로 길목과 한강변 주변으로는 전국적 단위의 시장들이 형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활기를 띠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 이어 미국 중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조약을 각각 체결하여 정동을 중심으로 서울 곳곳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외국인의 활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업도 시작되었다. 제중원으로 시작된 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지부, 그곳이 바로 엘러스의 정확한 목적지였다. 그녀가 오기 전인 5월 11일에는 고아원도 개원되었다. 의료와 교육이 병행되고 있었다.

선교사는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다

엘러스는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 2주일이 지났을 때 한국 선교를 전체적으로 낙관할 수 있을 만큼의 고무적인 행사에 참여하였다. 7월 18일 저녁 외국인들만 모이는 것으로 허락된 유니온교회에서 신자 노춘경에 대한 한국인 첫 번째 세례식이 거행되는 자리였다. 그 말고도 세례를 받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여러 명이 더 있다고 하니 선교에 대한 전망은 매우 밝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당시 알렌과 헤론, 그리고 언더우드 등 서울 선교지부의 선교사들은 첨예한 갈등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협력이 아닌 불화의 상황은 젊은 그들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보다 더 ‘빨리 빨리’를 외쳐대고 있었다.

엘러스도 이러한 대립과 갈등 상황으로 인한 곤란한 지경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이는 알렌이 1887년 11월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가면서 해소되기 시작해 헤론이 순직한 1890년 7월이 되어야 완전히 소멸하였으니 엘러스의 초기 사역기간 내내 그녀는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을 향하는 여정에서 품었던 그녀의 기대는 크게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가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부각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미 다 알린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는 그녀의 입장에서 몹시도 괴로운 일이었다.

선교사는 천사가 아니라 결국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실감했던 시기였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돌아가 남은 공부를 마치고 예전의 계획이었던 테헤란의 병원에 가서 마음껏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바램이었다.

제중원 여성병원에서의 18개월 동안 그녀의 가슴 속에는 후회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그녀는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선교에 관한 업무를 결정할 수 있는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 제중원과 관련된 일은 알렌 및 헤론과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는 이사였다.

무엇보다 엘러스는 자신이 의사가 아니라는 선교사들의 우려를 불식할 만큼 실제로 환자들을 진료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의술을 보여주었다. 또한 명성황후와의 만남을 통해 왕비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주치의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왕비는 그녀보다 아홉 살 위였다. 엘러스가 볼 때 왕비의 얼굴은 미소를 지을 때 아름다웠다. 왕비는 지체 높은 여인으로 친절함을 담은 인격을 소유했으며 강한 의지와 능력을 가진 인상을 주었다. 엘러스는 언제나 왕비로부터 가장 친절한 말과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왕비를 엘러스는 크게 존경했다.

왕비는 다리에 신경통이 있었고 불면증에 눈병이 심한 편이었다. 감기와 복통에도 자주 걸리고 빈혈도 있어 건강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엘러스는 이러한 왕비를 정성껏 보살폈다. 먼저 안색을 살핀 후 맥박과 체온을 측정했다. 처음에는 허락 없이 왕비의 몸을 진찰하는 바람에 왕비가 놀란 일도 있었다. 그녀는 자주 궁궐에 들어가 왕비를 진찰했고 왕비의 건강도 조금씩 좋아졌다. 그렇게 엘러스와 명성황후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제중원 여성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진료했고 그 결과도 좋은 편이었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다른 여의사가 한국에 오게 되었다. 1888년 1월 6일 왕실로부터 명성황후 주치의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2품 정경부인의 직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제중원 여성병원의 일을 새로 부임한 여의사 릴리아스 호튼에게 인계하고 의료사역을 그만두었다.

새로운 길을 가다

애니 엘러스에게 새롭게 주어진 길은 의료 대신 교육 사역이었다. 그녀는 1888년 3월 12일 자신의 집에서 15세의 학생 두 명으로 ‘정동여학당’이라는 여학교를 개교하였다.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부에 등록된 서울 선교지부의 여학교였다. 그녀는 매일 이들을 가르쳤다. 의료 사역을 내려놓고 나서는 거의 모든 시간을 여학교 사업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리고 11월에 서울로 들어온 메리 하이든에게 여학교의 당장직을 넘기고 자신은 보조의 역할을 맡았다. 이로써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주어진 그녀의 사명은 일단락되었다.

애니 엘러스에게는 서울에 와서 얻게 된 매우 의미 있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명성황후로부터 결혼선물로 받은 금팔찌였다. 그녀는 이것을 항상 자신의 왼쪽 팔목에 차고 있었다. 평소의 소원대로 조선의 땅에 묻히게 된다면 그것과 함께 묻히고 싶어 했다.

“앞으로도 조선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왕비의 당부를 떠올리며 남편과 함께 다른 선교부의 일원이 되어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을 무렵, 비운의 왕비는 궁궐 한 구석에서 시해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롭게 주어진 길은 조선을 떠난 다른 곳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엘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용민 박사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