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산수화’가 ‘붉은 역사화’로 바뀐 듯하다.
동양화의 여백 같은 캔버스의 흰 바탕, 그 위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붉은 풍경들이 몽타주 기법처럼 서로 섞이고 충돌하며 중중첩첩 다도해 섬처럼 둥둥 떠 있다. 멀리서 보면 여전히 ‘붉은 산수화’다. 조선 후기 실경 산수화의 현대적 버전이다.
화가가 먹색 대신 붉은 색을 쓴 건 군 복무 경험에서 비롯됐다. 야간 투시경을 쓰고 바라본 비무장지대(DMZ)의 풍경은 모노톤이다. 하지만 남북 대치의 긴장과 불안을 표현하자니 붉은 색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 붉은 산수에 사람들이 등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오바마 미국 대통령, 체 게바라 같은 정치적 인물들이다. 빛바랜 앨범 속에 있을 법한 어린 시절의 작가 자신과 아내, 형, 아버지 등 가족들도 보인다. 뿐인가. 피에타 상이 있고, 예수가 가로 누워 있기도 하다. 신작에서도 고향 시골집, 경복궁의 향원정, 도시 변두리 풍경, 바다의 등대, DMZ, 천안함 등 개인적 기억과 사회적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장면들의 파편이 몽타주 돼 있지만 중심이 되는 건 확실히 사람이다. 100명이 넘는 인물 군상이 들어있는 작품도 있다.
이세현(48) 작가가 3년 만에 돌아왔다. 경기도 파주 문발로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에서 ‘레드-개꿈’이라는 제목으로 신작을 대거 풀어놓았다. 지난 11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에게 제목부터 물었다.
“세월호 사건 때문입니다. 개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비극이 반복되고 있는 나라, 한 마디로 개판인 나라가 됐지요.”
“그래서 풍경 속에 인물을 그려 넣게 됐다”는 그는 “과거의 풍경 속에는 개발에 사라진 어머니 고향, 분단의 상처 등이 은유적으로 들어갔으나 이제는 풍경이 아닌 인물을 통해 더 직접적으로 발언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세월호 사건 때 유가족의 단식 투쟁을 조롱하는 보수집단의 폭식 투쟁에 환멸을 느꼈다. 풍경만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됐다”며 “예술가란 미적 쾌감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비극성을 담아야 한다. 인물이 가라앉거나 떠 있는 등 여러 가지 배치를 통해 비극성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중간 중간 그는 격분한 듯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풍경 속 인물의 선택과 나열도 개꿈처럼 비현실적이다. 한국전쟁 때 국군의 총구 앞에서 인민군 포로가 손을 들고 있는 장면 앞에는 반라로 선탠 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그 옆에는 졸업사진을 찍으며 활짝 웃는 가족들이 있다. 특히 누워있는 예수, 누워 있는 아버지 등 ‘누워 있는 인물’을 곳곳에 배치해 사람이 곧 대지 같은 효과를 내기도 했다.
그는 전통 실경 산수에 착안해 붉은 산수를 만들었다. 홍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2004년 영국 유학을 가서 이국에서 2006년부터 시작했으니 10년 가까이 고집하는 그의 브랜드다.
“서구의 현대미술은 역사 속에서 단계를 밟아오며 그들에 맞게 최적화된 겁니다. 그걸 따라가면 결국 아류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뭐가 다를까 고민하니 결국 자연에 답이 있더군요.”
하지만 이전의 그림에서 중심이 됐던 자연의 풍경은 이제는 인물 군상을 가리는 엄폐물이 됐다. 이는 여전히 붉은 산수 이미지를 잔존시키는 효과를 낸다. 거꾸로 비친 물속 풍경 같은 ‘리플렉션’, 원폭 구름처럼 뭉실뭉실한 구름 등이 등장한 것도 새롭다. 그의 산수는 일상의 재난,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고발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단색화에 비판적이다.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게 동양성으로 프로모션 되는 건 서양인의 관점입니다. 비합리적인 사건이 연일 터지는 한국사회에서 무위자연이 한국성인 것으로 세일즈 되는 현실이 과연 바람직한지….”
전시는 12월 20일까지. 관람료는 5000원이다(031-955-4100).
파주=글·사진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인터뷰-신작전 ‘레드-개꿈’ 여는 작가 이세현] 붉은 산수화 비극을 품다
입력 2015-11-15 19:43 수정 2015-11-15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