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만의 민주 총선.’ 지난 8일 실시된 미얀마의 총선 뉴스 제목 중 하나이다. 아,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까. 동시에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낙심했을지 눈에 선하다. 우리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독립을 기다렸고 민주화를 기다렸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세상의 이치가 있다. 기대하는 것은 금방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 세대에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신 34:4∼5)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비교적 긴 연극인데 결론만 중요시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싱거운 연극이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고 오늘도 오지 못한다는 전갈만을 보낸다. 이 작품을 쓴 새뮤얼 베케트는 작품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는 것에 대해 매우 신비롭고 다중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어쩌면 고도라는 기다림의 대상보다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종말을 설명하는 신학 용어 중에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이 있다. 천국은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주님이 속히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지만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친 시점에서 2000년이나 지났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을 2000년이나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여기서 ‘아직’을 ‘이미’로 만들어주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우리는 믿음을 통해 미래를 현재로 만든다. 믿음은 우리가 지치지 않고 느린 걸음을 계속 유지하는 기반이 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우리에게 긴 호흡과 느린 걸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못하면 미련 없이 우리의 기대를 다음에 넘겨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실천, 즉 미래를 현재에 구현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되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하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에서는 전날 꿈속에서 주님이 그에게 방문할 것을 약속한 것에 따라 주인공은 하루 종일 주님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중에 하루 동안 환대했던 여러 사람들이 결국 주님이었음을 알게 된다. 지금껏 위에서 말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에서 믿음의 실천을 보이는 것을 톨스토이의 방식으로 설명해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진맥진해 있다. 부디 지쳐 쓰러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묵묵히 느린 걸음으로 계속 걸을 수 있기를 응원한다.
최의헌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느린 걸음
입력 2015-11-13 18:33 수정 2015-11-13 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