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인 <1> “장애인 재활 40년 외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

입력 2015-11-15 18:35
장애인 재활 전문가로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김종인 박사는 교회 장로로서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장애인을 섬기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면 상큼한 새벽공기가 나를 맞는다. 주님과 교제 속에 시작하는 일과는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 넘친다. 2004년 9월 8일부터 시작된 이 새벽제단은 2015년 11월 15일 현재 4000일이 넘고 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절명의 순간에 시작된 1000번제가 세 번을 마치고 네 번째를 이어가게 하시니 하나님의 은혜다.

나이가 들고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느끼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인간이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쓰임받을 때’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아무리 잘났고,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해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란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내 삶에 좌정해 주셔서 ‘장애인 재활’이란 큰 사명을 주시고 한국인 최초로 미국 노던콜로라도 주립대에서 재활학 박사 학위를 받게 만드시고, 장애인 재활 및 복지 전문가로서 40년 외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한 분이 내게 “박사님은 보통 사람이 평생 할 일의 서너 배는 하신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이 내겐 “하나님이 함께해 주셔서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주셨다”는 말로 들렸다. 내 삶에서 정말 힘들었던 고비와 또 붉은신호등이 켜질 때마다 하나님은 부드럽고 포근한 손을 어김없이 내밀어 주셨다. 그리고 인도해 주신 그 길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내게 꼭 필요한 길이었음을 후일 깨닫게 된다. 이제 부족한 한 영혼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셨는지 그 간증을 나누고자 한다.

1956년 경남 창원에서 8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난 나는 후일 장로, 권사가 되셨던 부모님의 신앙 속에 교회생활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아버님은 가축사료 사업을 크게 하셨는데 상호가 ‘육일상회’였다. 6일만 일하고 주일은 쉰다는 뜻이었다. 육일상회는 5일장이 크게 열리는 날도 주일이면 어김없이 문이 닫혔다. 모범생에 공부도 잘했던 나는 창원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예비고사에 합격한 뒤 서울의 한 대학 입시를 치렀다. 그런데 1, 2차 모두 낙방했다. 당시 인기가 있던 수의학과와 공대를 지원해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재수를 시작해 이듬해 시험을 보았는데 역시 또 1, 2차 모두 고배를 마셨다. 정말 땅을 치며 울고 싶었다. 나를 지도했던 교사들은 왜 충분히 갈 수 있는 실력인데 시험만 보면 성적이 안 나오느냐고 한탄했다.

심한 열패감에 사로잡혀 앞으로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대구에 있는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 전신)에서 결원이 생겨 3차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다. 이곳 ‘특수교육학과’에 응시해 합격했다. 24명을 추가로 모집했는데 1000여명이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수교육학과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학교에 입학한 나는 등록금을 내면서 창구의 남자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특수교육학과는 무엇을 가르치는 덴가요?”

“그것도 모르고 왔어요. ×신들 가르치는 데요”

이 창구 직원의 말은 1970년대 당시 한국의 장애인 인식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모두 살아가기에 급급한 때라 장애인 복지와 교육이란 단어 자체를 이해 못했던 것이었다.

난 이 말을 듣고는 대학에 아주 잘못 왔다고 생각했지만 1∼2년 공부한 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편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대학에서 내 인생의 대반전이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약력=△대구대, 연세대·숭실대 대학원, 노던콜로라도주립대 대학원 졸업(인간재활학 박사) △홀트아동복지회 재활과장 역임 △나사렛대 부총장 및 재활복지대학원장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장 △한국재활상담사협회장 △밀알복지재단 이사 △분당영광교회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