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병삼] ‘學’이 아닌 ‘習’이다

입력 2015-11-12 18:37

‘학습(學習)’이라는 말은 ‘배워서 익힌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심리학적으로 학습이란, 배움을 통해 지속적인 행동의 변화나 그 잠재력의 변화를 기대한다. 배움과 변화에서 학습이 완성되는 것인데, 이 시대의 비극은 너무 많은 배움으로 지식만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지식은 자랄수록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지만, 모르는 게 있으면 ‘네이버’에게 물어보고, 네이버도 모르면 ‘아내’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는 배움과 앎의 ‘학’의 문제가 아니라 앎을 살아내야 하는 ‘습’의 삶이 있느냐이다.

10여년 전 ‘코칭’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전에는 수많은 기업과 정부 단체, 교회에서조차 카운슬링, 멘토링, 컨설팅이라는 기법으로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상대방과의 우월적 지식에서 상담을 해주거나 해답을 제시해주려는 지식의 전달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지식의 전달이 해결하지 못하는 관계의 부재, 소통의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소통의 문제 해결을 위해 수직적 지식의 전달이 아닌 수평적 개념의 ‘코칭’을 목회에 적용해 보았다. 코칭의 기본은 누군가 우월적 지위에서 일방적 답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지지하며 성장하는 방식이다. 교회에서 코칭 세미나를 진행하며 가장 인상에 남는 말이 있다. ‘옳은 개소리’다. 누군가 분명히 옳은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개소리’로 들린다. 그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관계가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에 감정적 영향을 받는 탓이다. 결국 아무리 지식을 전달해 주고자 해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KBS 아나운서 김재원씨는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소통’을 이렇게 정의했다. “소통이란? 나와 다른 사람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 그의 소통 강의는 ‘소’ 그림과 ‘통’ 그림을 먼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한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통이란 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소와 통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하지만 저 통이 소의 여물통이 되어줄 때 그 둘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소한테 여물통이 되어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소의 마음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와 다른 사람의 연결고리를 찾아나가는 것, 그게 소통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 불통의 극치는 이념적 지식의 양극단에서 서로에게 요구하는 소통에서 기인한다. 양 극단의 최고 지도자들은 서로가 만나지 않아서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서로 만나서 확인하는 것은 불통이다. 서로 만나지 않으면 만나지 않아서 소통이 안 되고, 만나면 만나서 대화가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착각에서 기인한다. 소통을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연관성의 고리를 가지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상대방에게 수용되는 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소통은 불통일 수밖에 없다.

사실 소통의 답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는다. 신앙의 본질이 ‘자기의 비움’이라는 말씀이 빌립보서 2장 7절에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는 방식을 우월적 지위와 지식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소’와 ‘통’의 관계 고리를 만들어주셨다.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사는 것으로 소통하셨다. 지식으로 인간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진정한 소통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생각을 수용하는 소통이 되는 것보다 내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아가는 소통이 필요하다.

김병삼(만나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