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추수는 가을에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말합니다. 추수감사절의 성서적 유래는 초막절입니다. 우리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의 전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미국 땅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첫 농사를 지어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는데 이때가 1621년 가을이었습니다.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통상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현대산업사회에서 ‘가을 곡식 거두는 일’이란 추수의 개념은 희박해져 갑니다. 추수라기보다 하우스재배 등 기계화된 방식이어서 ‘생산’에 가깝지요.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먹방’ 프로그램은 ‘생산의 풍요’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풍성’(딤전 1:14)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추수감사절(15일)을 앞두고 풍성한 ‘식탁’을 들여다봤습니다.
배추밭 김오막(70) 할머니에게 “연지곤지 찍고 조랑말 타고 시집 오셨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니여, 택시 타고 왔어.”
다들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곳은 전남 보성군 천봉산 자락 두메산골입니다. 1992년 인근에 수원지 주암호가 생기면서 더욱 오지가 된 곳입니다. 김 할머니는 요즘 동네 천봉산희년교회(이박행 목사)에 나가십니다. “왜 이제사 교회 다닐 생각을 하셨냐”고 하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간) 마음적으로 기도 많이 했어” 하십니다.
“주일마다 다니시면 복 받으실 텐데요.”
“그러고 싶지. 하지만 배추도 뽑아야 허고…교회 갈라 허면 괜헌 다리도 아프고…앞으로 꼭 가야것지. 목사님이 이렇게 우리 늙은이들 위해 애쓰는디.”
열아홉, 낭자에 비녀 꽂고 이웃 군(郡) 화순에서 시집온 오막 할머니에게 ‘봄날’은 잠깐이었고 평생 흙 파먹고 사는 세월이 시작됐습니다. 어느 한철 고생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만 요즘 같은 김장철은 허리 한번 펼 날이 없었습니다.
“시집 와서 큰집(시댁)에서 3년 만에 제금(분가)나서 내 살림을 했어. 그 첫해 김장을 하는데 서툴기 짝이 없었지. 냇가에서 배추 씻어 바로 절였어. 지금처럼 고무장갑이 어딨어. 손이 시려 손가락 떨어져나갈 것 같았지. 소금값이 오지게 비싸 맨물에 절이기도 했어. 지금이야 배추가 실하지만 그땐 어디 그래. 짜잔하고 뻣뻣해. 당최 먹을 것이 없어. 지금 사람들은 냇물로 씻은 배추 올린다고 허면 (비위생적이어서) 죽는다고 난리일 것이여 잉.”
오막 할머니는 ‘보성군 일봉리 산촌생태마을 절임배추위원회’ 위원이십니다. 생애 처음 단 ‘완장’이지요. 절임배추위원들은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할머니의 밭엔 1500포기의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주문에 따라 탄력적으로 출하를 하시죠. 10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남 3녀 출가해 대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혼자 사시죠. 개인택시 모는 아들이 자주 들러 생활비를 주곤 하지만 어쨌든 논, 밭에 나가 노동을 하십니다.
사실 농촌의 11월은 농한기입니다. 일봉2리 역시 3년 전까지만 해도 농한기를 보냈지요. 이 마을 가구라야 고작 20호, 마흔 명 안짝 주민이 삽니다. 모두 60대 이상으로 이장 김동복(57)·주점순(54)씨 부부가 제일 젊습니다. 이 중 15명 정도만 일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때문에 현대적 농법을 공부해야 하는 하우스 재배로 농한기 소득 올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도 오막 할머니에겐 평생을 살아온 행복한 마을입니다. 면사무소가 있는 장에 가려 해도 산길 10리(4㎞)였습니다. 천봉산 너머 큰 장 사평은 30리 길이었죠. 지금은 시멘트 포장된 길로 이장네 트럭 타고 휭 하니 갑니다. 세상 좋아졌죠.
할머니는 이태 전 반듯한 벽돌집을 지었습니다. 1층에 당신이 거하고 2층은 1남 3녀와 손자들이 올 때면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매일 반짝반짝 쓸고 닦습니다. 한데 새집 지은 돈을 조금씩 갚아 나가야 하고, 손자들 용돈도 주어야 하니 농한기라도 벌어야 합니다.
그 무렵 교회 이박행 목사가 절임배추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마을에 권했습니다. 이 목사 얘기에 마을 사람들 건성으로 “그려 그려 좋겄네” 하고 답했답니다. 이 목사는 일봉리 천봉산 중턱에 자연치유센터를 겸한 교회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배추의 생산과 유통에 대해 목사가 뭘 알랴 싶어 건성으로 답했던 거죠.
오막 할머니 생각엔 “아무리 도시 사람덜이라 하더라도 지들이 포기배추 사 다듬어 절이는 것이제 우리덜이 고것까정 한당가…” 싶었답니다. “할머니, 요즘 새댁들은 직장 다니느라 바빠서 김장할 틈이 없어요” 하고 이 목사가 설득했죠.
아무튼 이 목사와 이장 부부를 중심으로 ‘절임배추위원회’가 발족됐습니다. 협동조합 형태의 위원회입니다. 그들은 정부 지정 산촌생태마을 장점을 최대한 살려 친환경 농법으로 배추 농사를 짓자고 합의했죠. 천봉산은 해남의 황토 배추와 강원도 횡성의 고랭지 배추 생산지의 장점을 고루 갖춘 곳입니다. 땅이 좋고 일교차가 심하니 아삭하면서도 살짝 단맛이 나는 배추 경작이 가능한 것이지요.
위원회는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 창조 생태 환경을 간직한 자원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주암댐 상수원 청정 지하수로 배추를 세 번 이상 세척하고, 신안 천일염을 사용해 교회 양심을 걸고 생산하기로 한 거죠. 여기에 주 1회 천연 유황수 섞은 물을 배추밭에 주어 품질을 높였습니다. 농약도 치지 않고 일일이 배추벌레를 잡아냈죠.
마을 주민의 최대 애로인 판로는 교회가 개척했습니다. 온라인 환경에 능한 정반석 부목사가 홈페이지를 만들고, 택배 등의 유통 문제를 해결했지요. 때문에 농민들은 생태 배추 생산에만 주력하면 됐습니다. 이런 생태 배추 생산이 온라인 등을 통해 조금씩 알려지자 전남도가 ‘우수마을기업’ 예비 후보에 넣고 절임배추 자동화 세척시설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오막 할머니를 비롯한 위원들이 그제야 허리를 펴게 된 거죠.
지난 주일예배 이튿날 일봉마을에서 올해 첫 절임배추 출하가 시작됐습니다. ‘유황 절임배추’와 ‘프리미엄 항암배추’입니다. 항암배추는 항암력을 갖춘 종자랍니다. 오막 할머니는 9일 위생복을 입고 자동화 세척기 앞에 섰습니다. 11∼12월 사이 40여일간은 주문량 대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겁니다.
이 작업은 이 마을 ‘젊은피’ 주점순씨가 주도합니다. “허벌나게 바쁘다”는 그녀의 입가엔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원래 성격 좋으신 데다 교회를 통해 주문이 제법 들어오니 그럴 수밖에요. 첫 해 1000여 포기 심었던 주씨는 올해 2만5000포기를 재배했습니다. 논을 배추밭으로 만든 거죠.
“교회가 아니면 꿈도 못 꿨죠. 농한기에 인건비라도 벌고 싶었어도 일자리가 있어야죠. 그러니 남정네들 화투판 벌여 날 새곤 했다니까요.”
이날 강순자(가명·62)씨도 세척 작업장에 나왔습니다. 집 안에 장애인이 있습니다.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분인데 형편이 좋지 않습니다.
이 세 분을 비롯한 절임배추위위원들의 출하기 40여일 임금은 각기 250만원쯤 됩니다. 배추 포기당 1000원쯤에 납품하는 것과 별개지요. 일반 배추가 세 포기 1000원쯤 하는데 고수익인 셈입니다. 이분들은 신앙적으로 ‘건성 교인’입니다. 이 목사에게 미안한 마음에 자신들을 부러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 목사는 한 번도 이들을 재촉하지 않습니다. 주씨가 “목사님께 이야기하면 다 들어주신다. 근데 항상 그게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합니다.
절임배추 출하 첫 날 배추 세척장 앞에서 이들은 이 목사의 기도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기도에 서툰 오막 할머니에게 뭘 위해 기도했느냐 물으니 “자식들 건강하고 우리 마을 사람들 화목하고 목사님과 교회가 저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이곳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이 목사는 이날 “수르 광야에 들어가 사흘 길을 걸었어도 물을 얻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여 먹인 하나님의 은혜가 이 외진 마을에도 미치게 해 달라”며 “우리 삶이 말씀으로 절임되어 우리 쓴 육신이 단물을 마시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간구했습니다(절임배추위원회 061-853-7310).
보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미션 르포] 산골 ‘건성 교인’들 배추委 완장 차다… 전남 보성 천봉산희년교회 절임배추위원회
입력 2015-11-13 19:14 수정 2015-11-13 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