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명의 군인들이 한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난초’를 꽂은 한 여인은 자신을 향한 총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는다. 죽음의 공포를 초월한 결연한 모습에 총을 든 군인들은 주춤주춤 물러선다.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 아웅산 수치(70) 여사가 전국을 순회하며 세를 불려가자 군부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집회를 원천봉쇄했다. 그러나 수치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총구 앞에 당당히 맞섰다. 영화 ‘더 레이디(The Lady)’에 소개되기도 했던 이 일화는 미얀마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수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명연설을 통해 “부패한 정권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킨다.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고 했다.
영국인 남편과 결혼해 평범한 두 아들의 엄마로 살던 수치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만든 건 1988년 8월 8일 전국적으로 벌어진 ‘버마판 광주항쟁’인 ‘8888항쟁’이었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미얀마에 귀국한 수치는 군부의 총칼에 2000명 이상 학살된 참극을 목도하면서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다. 15년간의 가택연금과 목숨 건 단식투쟁, 죽어가는 남편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면서 수치가 지켜온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마침내 군홧발과 피로 얼룩졌던 미얀마에 봄을 가져왔다. 수치가 이끄는 야당 NLD는 지난 8일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반세기 넘게 이어진 군부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총선 다음 날 쏟아지는 폭우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수치)는 온 세계가 다 아는 지도자…독재는 끝났다. 독재는 물러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승리를 자축하는 미얀마 국민들의 표정에선 민주주의 새벽을 맞이한 벅찬 환희가 묻어났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다 1979년 10·26사태로 유신체제가 끝나면서 맞았던 ‘서울의 봄’이 그랬다.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 시대가 열릴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같은 해 12·12쿠데타로 득세한 전두환 군부세력에 의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가 내려지고 5월 18일 광주항쟁이 벌어지면서 ‘서울의 봄’은 끝났다.
서울의 봄 이후 35년이 지났다. 미얀마의 수치와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를 총탄에 잃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은 아버지 뒤를 이어 민주화 투사로 미얀마의 봄을 이끌어냈다. 다른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 역사의 시계를 뒤로 돌리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魂)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당위성을 항변한다. 절반이 넘는 국민들이 반대하고 들불처럼 지식인들의 반대 성명과 집필 거부가 이어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민주적 가치와 다양성이 상실된 구시대 잔재인 국정 교과서 체제로 되돌리고 북한, 베트남, 스리랑카, 몽골 등 국정 교과서만 발행하는 국가들에 이름을 올리려는 이유는 뭘까.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겠다는 대통령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다 해도, 좌파 학자들에 의한 일부 역사 교과서의 왜곡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획일화된 역사관을 강요하는 것은 삼청교육대를 연상시키는 우울한 일이다.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가 ‘아버지 명예회복’이라는 항간의 의심이 사실이 아니라면 말이다.
미국 작가이자 인권 옹호가인 하워드 진은 “역사상 중요했던 수많은 순간에 가장 용감하고 효과적인 정치적 행위는 인간의 목소리 그 자체였다”고 했다. 훗날 역사는 뭐라고 평가할까.
이명희 국제부장 mheel@kmib.co.kr
[데스크시각-이명희] 미얀마의 봄, 서울의 겨울
입력 2015-11-11 1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