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가지 아래 있고(無等山高松下在)/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 물이더라(赤壁江深沙上流).’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1807∼1863)이 적벽(赤壁)을 노래한 시다. 적벽에 반한 그는 방랑벽을 잠재우고 무려 13년을 머물며 수많은 시를 남겼고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에서 생을 마쳤다.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 했다. 적벽이 신선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문신 석천 임억령의 얘기다. 적벽은 조선시대 중종(1519년) 때 기묘사화로 화순에 유배된 신재 최산두(1483∼1536)가 중국의 적벽에 빗대 이름 붙였다. 붉은색 기암괴석이 소동파가 노래한 중국 양쯔강의 황저우(黃州) 적벽에 버금간다는 이유에서다.
기묘사화로 중종 때 유배된 조광조(1482∼1519)는 적벽의 절경을 보며 한을 달랬다. 대학자 하서 김인후는 적벽시를 지어 화답했다. 다산 정약용도 10대 후반에 부친을 따라와 적벽을 만났다. 이후 수많은 풍류 시인들이 이곳에 머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근대까지 ‘조선 10경’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경치뿐 아니라 지질학적 가치도 평가받고 있다. 지금부터 약 1억3600만∼6500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 퇴적층 내 층리(평행한 줄무늬)면이 넓게 발달돼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시루떡을 켜켜이 쌓아놓은 듯하다. 이에 힘입어 국가지질공원인 무등산권 지질공원의 명소로 등극했다.
그 적벽을 만나러 갔다. 화순군 이서면 동복댐 우회도로를 따라 6㎞를 내달리니 광주 상수도사업본부 초소가 나온다. 화순적벽으로 가는 진입로다. 미리 허가를 받지 않으면 적벽투어에 사전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적벽은 1985년 동복댐 일대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뒤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됐다. 실향민들에게만 간간이 개방됐을 뿐이다.
굳게 잠겨있던 철문이 열리자 말끔하게 단장된 임도가 얼굴을 내민다. 길이 비교적 넓고 평탄하다. 버스 한 대 지날 정도의 폭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비포장 산길을 따라 4㎞를 달리자 왼쪽으로 시야가 탁 트이더니 숨어있던 태고의 비경, 노루목(장항)·보산·창랑·물염적벽 등 4개의 적벽 중에 가장 크고 멋있다는 노루목적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산의 형세가 노루의 목을 닮았다고 이름 붙었다. 산길에 노루가 많이 다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한자로는 장항적벽이다. 망미정 앞에 있다고 해 망미적벽으로도 불린다. 일반적으로 ‘화순적벽’은 노루목적벽을 일컫는다.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웅장하게 솟아오른 붉은 기암괴석은 하늘과 호수 사이에 펼쳐진 병풍 같다. 거대한 바위벼랑이 잔잔한 물결에 비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맑은 빛의 호수, 파란 가을하늘과 색색이 물들어가는 단풍까지 버무려져 한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선경(仙境)에 빠진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비경이다. ‘조선 10경, 전남 제1경’이 허언이 아니다.
옹성산(해발 572.8m) 자락을 둘러친 붉은 때깔의 절벽은 그 길이가 무려 7㎞에 이른다. 높이가 최대 80m에 달한다는 적벽은 1980년 동복댐이 세워지면서 장항·보산·물염·창랑 등 15개 마을과 함께 수몰됐다. 수몰 전 높이가 100m 가까이 됐다고 하니 그 위용이 짐작된다.
절벽 언저리에 절집 한산사도 있었다. 아래로는 물이 흘렀다. 모래밭이고 자갈밭이어서 으뜸 물놀이 터였다. 인근 학생들의 단골 소풍지였고, 대학생들의 모꼬지(MT) 장소였다. 삿대를 저어 가는 나룻배가 떠다녔다. 그 배를 타고 뱃놀이도 즐겼다. 4월에는 마을의 장정들이 절벽에 올라가 짚덩이에 불을 붙여 아래로 떨어뜨리는 낙화놀이가 펼쳐졌다.
노루목적벽 앞에서 망향정을 품고 있는 작은 적벽이 보산적벽이다. 노루목적벽보다 규모가 작지만 세파에 깎이고 파인 모양새가 신비롭다. 망향정은 수몰지역 주민들의 설움을 달래주는 쉼터다. 돌 석축으로 기반을 닦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검정 기와를 올린 전형적인 누정이다. 망향정 옆으로 수몰된 마을의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정든 고향을 떠난 주민은 창랑, 월평 등 15개 마을 5000여 명에 이른다.
적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해 10월. 광주광역시와 화순군이 상생 발전을 위해 개방에 합의하면서다. 30년 동안 기다렸던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투어는 매주 수·토·일요일 이뤄진다. 화순군 홈페이지(tour.hwasun.go.kr)를 통해 예약해야 한다. 12월부터 내년 2월까지 겨울엔 버스투어를 운영하지 않는다.
화순=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김삿갓이 13년 머물다 세상 떠난 전남 화순적벽
입력 2015-11-11 19:03 수정 2015-11-12 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