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르완다 학살 사건 때다. 후투족 학살을 피해 몰려든 투치족 난민들이 수용소에서 담요만 두른 채 떨고 있는 사진을 본 도쿄의 30대 건축가 반 시게루(58·사진)는 충격을 받았다. 유엔에서 알루미늄 골조를 지원하지만 난민들은 이를 팔기 일쑤라 텐트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찾아갔다. 그러곤 수년 전부터 실험해 온 ‘종이 관(paper tube)’을 뼈대 삼아 짓는 천막촌을 제안했다.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는 현장에서 구하기 쉽고, 값이 싸며, 재활용 가능한 종이 튜브를 이용해 이재민을 위한 임시주택을 짓는 것으로 유명하다. 르완다 난민수용소를 시작으로 1995년 고베 대지진, 2006년 스리랑카 지진, 2010년 아이티 대지진, 그리고 지난 4월 네팔 지진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재난 현장은 어디든 달려갔다. 그래서 ‘종이 건축가’ ‘세상을 살리는 디자이너’로 불린다. 지난해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헤럴드디자인포럼 참석차 방한한 그가 10일 서울 종로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도쿄에서 태어나 뉴욕의 쿠퍼 유니언대를 졸업하고 1985년 반 시게루 건축사무소를 설립했다. ‘사회적 건축가’로 살게 된 이유는 뭘까.
“건축가로 일하며 실망감이 적지 않았어요. 결국 내가 권력과 부를 거머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몰려왔던 거지요. 특권층을 위해 일하다 보니 임시가옥을 짓는 거는 생각도 못하는 거고요.”
그는 “종이로 지은 집이지만 20년 전 지어진 게 지금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첫 시도였던 만큼 처음에는 정부의 건축 허가를 받는 게 쉽지 않았다.
종이관의 두께가 얼마나 돼야 튼튼할지가 궁금했다. 그는 “이 테이블 위의 물병, 컵 뭐든 건축물의 지지체로 쓸 수 있다. 종이라고 다를 건 없다”며 “종이 튜브 역시 건축물 하중을 얼마나 견딜까 하는 공학적 계산을 해서 두께를 달리 한다”고 설명했다.
“콘크리트로 지은 집은 결국 재해로 쓰러지면 더 큰 피해를 내게 되지요. 종이는 가벼워 그런 면에서 더 안전한 재료입니다.”
종이집이 편안해 앞으로 돈을 내고서라도 이런 집에서 더 살고 싶다는 이재민들의 인사를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웃었다. 간담회에 앞서 강연에서는 미술관, 엑스포, 상업건물 등 자신의 디자인 철학이 밴 다양한 건축물도 소개했다. 그는 건축물의 기능적인 면을 디자인에 녹여내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강조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세상을 살리는 디자이너’ 건축가 반 시게루 “종이로 지은 집 20년 지나도 끄떡없어”
입력 2015-11-10 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