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직업은 화가이다.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화가의 꿈을 이뤘다고 말하기보다 그림을 생업으로 하여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지켜나가는 가장으로서 역할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랴 생각하면 내 인생이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 또한 오로지 그림만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 약간의 취기에 객기가 발동하면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겼고 대학 극예술 연구회 근처를 배회하며 내가 무대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연기하는 것을 상상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림만을 그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화가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모름지기 한 우물을 파야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살았다. ‘여러 우물 파 봐야 저만 힘들 뿐’이라는 농담도 한다. 아무튼 나는 융통성 없고 지루하게 한 우물만 파고 또 판 끝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천직이 되었다.
내 주변에는 간혹 점심을 같이하는 법무사 한 분이 있다. 천성이 선하고 순수한 그는 처음 만날 무렵부터 음악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일보다는 사무실 밖에서 노래 부르는 일이 좋아졌다고 했다. 예순을 앞둔 그는 베토벤 같은 머리를 하고 성당에서 합창단을 지휘하기도 하며 이따금 바리톤으로 무대에 서서 공연도 한다. 딱딱하고 무료하게 생각하던 법 관련 업무도 노래를 부르듯 하게 됐다면서 매력적인 저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즐거움과 행복함에 대해 ‘전도’를 하고 다닌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해 즐겨 그림을 그렸고 미술대학으로 진학하기를 원했던 친구도 있다. 장남에다 장손인 그는 부모가 바라던 대로 자신의 뜻을 꺾고 경영학을 전공했다. 대기업의 중역이 된 지금 그는 나와 자주 만나기도 하고 틈나는 대로 화가의 작업실이며 전시회를 찾아 기웃거린다. 그는 요즘도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그는 가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그림을 그렸더라면, 그래서 화가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나에게 물어보곤 한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을 터인데도. 누구나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인지.
나는 요즘 십여명의 중년 남녀를 1주일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랜 기간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관심을 갖는 이상의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이라는 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 그리기를 절실히 원하는 그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내가 이제까지 작업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말해주는 정도이다. 그들 스스로의 가슴속에 있는 열정과 진심이 세상 밖으로 빠져나와 각각의 작품으로 형상화되는 것을 조금 도와주는 정도이다.
미국의 모지스라는 여성은 열 명의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바빠 평소에 그토록 그리고 싶어 하던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여성이자 아내이며 어머니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고 판단하고 일흔여섯 살에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도 받지 않았다. 자기가 살아왔던 마을의 풍경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마을에 대한 추억을 마치 어린이가 그린 것처럼 꾸밈없이 담담하게 화폭에 담았다. 백세가 넘도록 그림을 그린 그녀는 국민화가로 미국인들의 가슴에 따뜻하게 남았다. 그녀가 말하는 듯하다. 꿈꾸기에 늦은 시간은 없다고.
나도 부르고 싶은 노래를 실컷 부르고 무대에서 이리저리 뒹굴어 봐야겠다.
최석운 화가
[청사초롱-최석운] 꿈꾸는 사람들
입력 2015-11-10 1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