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봄] 아웅산 수치는 누구인가… 군부통치 항거 민주화운동의 상징

입력 2015-11-09 21:52
아웅산 수치 여사가 자유 총선이 치러진 다음날인 9일(현지시간) 양곤에 있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당사 발코니에서 연설한 뒤 지지자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다.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수치 여사와 NLD의 단독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얀마에서 반세기 동안 이어진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 정권으로의 평화로운 정권 이양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AP연합뉴스

“공포야말로 진정한 감옥이며, 진정한 자유란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1991년 6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전년도 사하로프인권상 시상식 자리에는 수상자의 목소리 대신 수락 연설문만 울려퍼졌다. 같은 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 평화상 시상식 역시 주인공이 자리에 없었다. 두 빈자리는 비폭력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자 ‘철의 난초’라 불리는 아웅산 수치(70) 여사의 것이었다.

수치 여사는 15년간 가택연금을 당한 채 보냈다. 군부독재가 지배하는 미얀마에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려고 노력한 대가였다. 수치 여사는 미얀마 독립운동 지도자인 보조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났다. 15세 무렵 영국에 건너간 뒤 옥스퍼드대를 졸업, 남편을 내조하며 평범한 주부로 살던 수치 여사의 인생은 1988년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귀국하면서 격랑에 휩싸였다.

귀국 후 군사통치에 항거하는 ‘8888항쟁’에 뛰어든 수치는 감동적인 연설로 대중을 사로잡으며 민주화운동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당시 군부가 물러나자 수치 여사는 같은 해 미얀마 민주화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는 이듬해 수치 여사를 가택연금시켰다. 눈엣가시이던 수치 여사에게 그간 군부는 수차례 출국을 권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미얀마에 남았다. 19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암으로 사망할 때도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출국을 포기했다.

1990년 총선에서 NLD는 82% 의석을 차지하며 압승했으나 군사정부는 정권 이양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2010년 국제사회의 압력에 연금이 해제된 뒤 2012년 4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수치 여사는 45개 선거구 중 43개에서 NLD의 승리를 이끄는 한편 자신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이번 총선을 통해 마침내 오랜 민주화운동의 결실을 이끌어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