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의료기기 제조·판매업체 지멘스는 국내 CT(컴퓨터단층촬영)와 MRI(자기공명영상) 장비 시장 1위 업체다. 국내에서 운용 중인 CT와 MRI 기기 3대 중 1대는 지멘스 제품이다. 대학병원 등 대형병원에서 지멘스 제품 만족도는 높다. 첨단 기술을 탑재한 의료기기인 만큼 수리나 관리 서비스가 중요한데 제너럴일렉트릭(GE) 등 다른 경쟁사에 비해 빠른 서비스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소형병원과 국내 수리 업체에 지멘스는 ‘갑(甲)’ 그 자체다. 우선 CT와 MRI 매매 계약서부터 대형병원과 다르다. 지멘스는 대형병원 계약서에는 없는 ‘소프트웨어의 모든 권리는 지멘스사에 있고 이를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는 지적재산권 보호 규정을 넣었다. 지멘스는 이를 근거로 장비 구입 후 유지·보수 서비스를 국내 수리 업체에 맡기는 것을 사실상 원천 봉쇄하고 있다. 국내 업체의 유지·보수 비용은 월 500만∼600만원선이지만 지멘스는 월 1000만원 정도다. 중소형병원으로부터 지멘스 장비에 대한 유지·보수 계약을 한 국내 업체 10여곳은 지난 9월 지멘스로부터 지적재산권 침해 혐의로 형사고발당했다. 한 소형병원 관계자는 7일 “차로 치면 10억원짜리를 구입했는데 차체만 우리 소유이고 차를 움직이게 하는 전자장치는 평생 지멘스가 갖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멘스의 ‘갑의 횡포’ 의혹 조사에 나섰다. 지멘스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CT와 MRI 장비를 팔면서 소프트웨어 격인 유지·보수 상품을 ‘끼워 팔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국내 수리 업체의 시장 진입을 원천적으로 막아 경쟁을 제한했다는 의혹도 있다. 공정위는 지난 3일 서울에 있는 한국지멘스 본사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공정위는 확보한 매매계약서를 분석해 지멘스가 대형병원, 중소형병원과 맺은 계약서 내용이 상이한 것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멘스가 자사와 유지·보수 계약 연장을 하지 않은 중소형병원 측에 장비 수리를 위해 필수적인 소프트웨어 패스워드를 알려주지 않는 사실도 밝혀졌다. 공정위에 지멘스의 불공정 행위를 신고한 A병원 관계자는 “지멘스 CT 장비 구입 후 10년이 지나서 국내 수리 업체에 유지·보수 업무를 맡겼지만 지멘스가 수리에 필요한 패스워드를 지재권 보호를 이유로 알려주지 않아 피해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반면 경쟁사 GE는 소프트웨어 패스워드를 모두 공개하고 있다. 특히 지멘스는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소프트웨어 패스워드를 공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터키 공정거래 당국은 2009년 한국에서와 같은 지멘스의 행태를 불공정 행위로 판단했다. 이런 의혹들에 대해 지멘스 측은 “공정위 조사가 진행 중인 사안이기 때문에 언급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렇게 부풀려진 CT와 MRI 장비 유지·보수 비용은 결국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지적이다. 건강보험공단은 매년 CT와 MRI 의료수가를 정하는데 여기에는 장비 유지·보수 비용도 포함된다. 지난 한 해 우리 국민이 지출한 CT와 MRI 촬영 비용만 1조2521억원에 달했다.
세종=이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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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끼워팔기·계약차별 지멘스 ‘甲의 횡포’
입력 2015-11-09 2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