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정태] ‘빼빼로데이’에 묻힌 기념일들

입력 2015-11-09 18:06

특정일을 기념일로 정해 수요를 창출하는 ‘데이 마케팅’ 중 가장 성공한 건 1997년 만들어진 ‘빼빼로데이’(11월 11일)다. 빼빼로 연간 매출(약 1000억원)의 절반 정도가 빼빼로데이 시즌에 발생한다니 효과가 대단하다. 지난주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성인 남녀 56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장 많이 챙기는 ‘데이’도 빼빼로데이(72.8%)였다. 연인들의 이벤트인 밸런타인데이(2위·72.4%)를 앞선다.

1자가 네 번 겹치는 11월 11일은 숫자 마케팅으로 아주 유용한 날이다. 그래서 정부와 공공기관 등이 정한 공식 기념일도 적지 않다. 우선 농림축산식품부가 1996년 지정한 ‘농업인의 날’이 있다. 11의 한자 ‘十一’을 합치면 흙(土)을 상징하는 ‘土月 土日’이 된다는 의미에서 택일됐다. 2006년부터는 쌀 소비 촉진을 위해 ‘가래떡데이’ 행사를 병행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사람의 두 다리를 연상시킨다며 걷기 활성화 차원에서 2010년 지정한 ‘보행자의 날’, 기차 레일을 닮은 숫자에 착안해 코레일이 철도 이용을 장려하고자 2011년 지정한 ‘레일데이’도 이날이다. 또 해군 창설 기념일이며 안과학회가 제정한 ‘눈의 날’, 한국지체장애인협회가 지정한 ‘지체장애인의 날’이다. 세계 최초로 10일 젓가락 페스티벌을 여는 청주시는 ‘젓가락의 날’로 선포한단다.

세계사적으론 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이다. 6·25전쟁에서 산화한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안치된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묵념하는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국제 추모행사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진행됐다.

한데 의미 있는 기념일과 달리 국적불명 기념일이 너무 성행한다. 빼빼로데이는 법정 기념일까지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지 오래다. 연인들을 타깃으로 한 각종 데이는 1월 다이어리데이를 시작으로 매월 14일에 1년 내내 잡혀 있다. 교묘한 상술과 억지에 우리 고유의 뜻 깊은 기념일마저 묻혀버리는 요즘 세태가 씁쓸할 뿐이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