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가정의 양립’이 뜨거운 이슈인 것은 연간 근로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위인 한국만이 아니다. 일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선진국에서도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이뤄야 할지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논제다. 미국에서는 맞벌이 부부가 육아 등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고, 독일에서는 여성들이 가정 살림을 위해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항상 지쳐 있는 미국의 맞벌이 부부
캘리포니아 환경보호 기관에서 일하는 에이미 반스는 남편과 같은 회사에서 맞벌이를 하고 있다. 그에게는 15개월 된 아이가 있다. 반스는 회사에서 유연 근무제로 일하고 있고, 가까이 친척이 있어 맞벌이 부부 치고는 육아하기에 조건이 좋은 편이다. 이런 반스에게도 일과 가정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그는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친구와도 자주 만나지 못한다. 집안 걱정에 회사일도 만족할 만큼 수행하지 못하는 듯해 늘 괴롭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8일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국 가구 중 맞벌이 부부 비중은 1970년 31%에서 올해 46%까지 늘었다. 이들의 삶은 팍팍하다. 전일제로 일하는 맞벌이 부부 중 여성의 39%, 남성의 50%는 아이들과 너무 적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답했다. NYT는 최근 미국의 맞벌이 부부를 “스트레스를 받고, 지쳐 있고, 조급한 현대 가족의 초상”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에서도 맞벌이 부부 중 남성보다 여성의 부담이 컸다. 맞벌이 여성 59%는 여가시간이 너무 적다고 불평했다. 또 41%는 아이가 있다는 게 자신의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고 답했다. 남성의 경우에는 단 20%만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 답했다. 미국에서도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 OECD 통계를 보면 미국 근로자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지난해 1789시간이었다. OECD 평균은 1770시간, 한국은 2124시간이었다.
미국인들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미국의 근로시간이 너무 길다고 주장한다. 미국인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8.7시간인데, 국제 여론조사기관 유거브(YouGov)의 최근 조사를 보면 미국인들의 56%는 7시간이나 그보다 적은 시간 일할 때 생산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물론 미국에서도 근로시간 단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있다. 공화당 대선 경선 주자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가 대표적이다. 부시 전 주지사는 지난 7월 한 지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인은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면 현재보다 배 이상의 경제성장률도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화당의 생각은 대체로 부시와 같다. 그들이 근로시간 정책에서 모범으로 삼는 나라가 긴 근로시간에 지쳐 있는 한국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공화당의 생각에 대해 “게으름의 도그마라 불리는 (공화당의) 사고 틀은 임금 양극화와 같은 경제 불평등 현상을 개인이 게으르고 나약한 탓이라고 책임을 돌린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살림 위해 시간제 일자리 택하는 독일 여성
독일에선 여성 근로자의 일-가정 균형이 이슈다. 독일은 1인당 연간 평균 근로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짧은(1371시간) 국가지만, 상대적으로 가정 살림에 부대끼는 여성 근로자에겐 이마저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가정친화적 인사정책 연구센터(FFP)’가 발표한 여성의 근로계약 형태와 가정생활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한 여성 근로자 대부분이 집안일에 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시간제 근로계약 형태를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에서도 부부 사이의 전통적 역할 분담이 영향을 끼쳤다. 전일제 정규직 남성 근로자의 대부분은 직업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정생활을 유지하는 아내가 있는 반면, 전일제 정규직 여성 근로자는 대부분 미혼이었다. 전일제 정규직에 종사하는 남성의 경우 59%가 기혼이었으나, 전체 평균 기혼자 비율은 38%에 불과했다.
또 육아나 가정 살림 때문에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하는 쪽이 대부분 여성이다 보니 남성보다 여성의 근로시간이 줄어들었다. 한스 뵈클러 재단 산하 경제사회연구소(WSI)의 ‘근로시간 보고서’를 보면 1992년 약 34시간이었던 여성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2012년 약 30.5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남성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1992년 41.8시간에서 39.8시간으로 약 2시간 줄어드는 데 그쳤다. 그 결과 남녀 간 주당 근로시간 격차는 7.8시간(1992년)에서 9.3시간(2012년)으로 더 커졌다. 유럽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WSI는 “비정규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 현상이 여성의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성별에 따른 근로시간 불균형이 지속적으로 심화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선 남성의 일·가정 양립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저출산 대책 마련 등을 위한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해 2002년부터 ‘21세기 성년자 종단 조사’라는 패널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남편의 휴일 가사·육아 시간별 둘째 이상 자녀 출산 상황을 보면 ‘가사·육아 시간 없음’의 경우 출산 비율이 11.9%에 불과했으나 ‘2시간 미만’은 29.0%, ‘2시간 이상 4시간 미만’ 56.1%, ‘4시간 이상 6시간 미만’ 72.1%, ‘6시간 이상’ 80.0%로 상승했다.
세종=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월드 이슈] 선진국 맞벌이들도 ‘근로시간과의 전쟁’… 미국·독일·일본의 현실
입력 2015-11-09 19:05 수정 2015-11-09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