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를 하게 돼 기쁩니다. 간밤에 한숨도 못 자서 이렇게 일찍 나왔어요.”
8일(현지시간) 미얀마의 옛 수도인 양곤의 한 투표장 앞에서 줄을 서서 투표시간을 기다리던 온마르(38·여)씨는 AP통신에 이렇게 말했다. 25년 만의 자유 총선이 치러진 이날 미얀마 각지에서는 꼭두새벽부터 투표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나선 시민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미얀마 전역 4만500여곳의 투표소에는 오전 6시 투표 시작 전부터 유권자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AP통신과 BBC방송 등이 전했다. 온마르씨는 “정말 공정하고 자유로운 투표가 이뤄진다면 아웅산 수치(70)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미얀마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1962년부터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군부독재가 이어졌다. 1988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8888운동)로 군부정권이 퇴진했지만 재차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는 시위를 무력 진압한 뒤 재집권했다.
NLD를 결성해 군부에 맞섰던 수치 여사는 1989년 7월 무기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NLD는 1990년 총선에서 492석 중 392석을 얻어 압승을 거뒀으나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수치 여사는 가택연금 중인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군부는 2010년 총선에서도 수치 여사의 출마를 허용하지 않았다. NLD는 부정·관권 선거를 이유로 선거에 불참했다.
이 때문에 자유·보통선거를 표방한 이번 선거는 NLD가 1990년 이후 처음 참여하는 총선이 됐다. 2010년 총선 직후 가택연금에서 해제돼 2012년 국회의원이 된 수치 여사는 이날 오전 거주지인 양곤의 한 투표소에 붉은색 상의와 하얀 치마를 입고 자신의 상징으로 꼽히는 ‘난초’를 들고 나타나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한 표를 행사했다.
미얀마 국민 5574만명 가운데 약 63%인 3500만명의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하는 이번 선거에서는 상·하원의원 491명과 주 및 지역 의회 의원 644명, 민족대표 29명 등 1164명을 선출한다. 미얀마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 선거에 91개 정당과 무소속 후보를 합쳐 모두 6300여명이 입후보했다고 밝혔다. 투표는 이날 오후 4시 종료됐으며 선관위는 투표율이 잠정 80%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투표 결과는 9∼10일 1차 발표 후 검표를 거쳐 11월 중순쯤 공표된다.
미얀마의 민주화나 개혁개방의 지속 여부를 가늠할 시금석이란 평가를 받는 이번 총선은 그러나 제도나 절차 등에서 여전히 많은 결점을 노출했다. 대통령제 국가인 미얀마는 대통령을 상·하원 합동 의회에서 선출하기 때문에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려면 상·하원의 과반을 차지해야 한다. 그러나 선거와 상관없이 군부가 헌법에 의해 상·하원 의석의 25%인 166석을 할당받았기 때문에 NLD가 집권하기 위해서는 총선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획득해야만 한다. 이런 제도적 결점 때문에 NLD가 집권 군부를 대표하는 통합단결발전당(USDP)에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도 NLD의 실제 집권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또 불교도가 다수인 미얀마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 ‘로힝야족’은 시민권은 물론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점도 결점으로 꼽힌다. 유엔은 이에 대해 미얀마 정부에 ‘중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NLD가 승리할 경우 수치 여사의 차기 행보도 관심사다. 미얀마에서는 내년 2월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지만 영국인 남편을 둔 수치 여사는 ‘가족 중 외국인이 있는 사람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는 헌법 조항 때문에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헌법 개정도 무산됐다. 그러나 수치 여사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더라도 NLD가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으면 자신이 연정 지도자가 되겠다고 밝힌 바 있어 향후 재임 가능성이 있는 테인 세인(70) 대통령과의 역학관계도 주목된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53년 군부독재의 땅에 ‘민주화의 꽃’ 필까… 미얀마 25년 만에 자유 총선
입력 2015-11-08 21:18